지금 이 순간, 집 즐기기

2022.11.15 14:09조회수 722

마스터 소개 – 미깡

웹기획자 출신의 웹툰 작가,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원작 웹툰 <술꾼도시처녀들>의 작가이자, 만화 <거짓말들>, <하면 좋습니까?>와 에세이 <해장 음식: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을 썼다. <술도녀> 속 꾸미, 정뚱, 리우와 같은 99학번으로,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을 통해 세상과 공감하고 나아가 평범하지만 때론 특별한 일상 속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그 물건의 별칭은 ‘가제트손’이었다.

80년대 초반에 TV 만화 <형사 가제트>를 봤던 사람이라면 대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팔이 죽 늘어나는 가제트 형사처럼 내 팔을 늘려준다는 뜻으로, 세탁소나 의류 매장에서 쓰는, 높은 행거에 옷을 걸거나 내릴 때 사용하는 그 기다란 막대기 말이다.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던 나는 무려 5년 동안이나 종아리에 쥐가 나고 어깨 담이 결렸다. 

무슨 얘기냐면 우리집 안방의 붙박이장 이야기다. 이사 올 때 설치되어 있던 붙박이 장롱. 집주인이 장신이셨는지 행거가 상당히 위쪽에 달려 있어서, 키 156센티미터의 나는 한껏 힘주어 까치발을 해야만 옷걸이를 걸고 내릴 수가 있었다. 무거운 겨울 외투를 내리다가 옷걸이가 부러진 적도 있고, 팔을 길게 늘이다가 잘못 움직여서 목이나 어깨를 삐끗하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니 바쁜 시기에는 아주 신중하고 천천히 움직여야만 하는 옷장을 쓰기가 꺼려져서 가방 따위를 걸어두는 스탠드 옷걸이에 대충대충 옷을 걸었다가 옷감이 보기 흉하게 늘어나는 일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세탁소에 갔다가 그 ‘가제트손’을 보게 된 것이다. ‘맞아, 저런 신통방통한 물건이 있었지! 가정용으로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2천원도 하지 않았다. 이틀 만에 배송을 받아 처음 써본 소감은? 육성으로 “말도 안 돼!”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막대 끝에 달린 고리에 옷걸이를 걸어서 위로 올리면 옷이 착착 걸리고 착착 내려왔다. 이렇게 편한 것을 놔두고 어째서 5년 동안 불편해 했지? ‘가제트손’의 존재를 정말 몰랐나? 이번에 세탁소에서 본 게 최초의 발견은 아니다. 예전에도 분명 본 적이 있었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도구가 있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불편을 적극적으로 해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편함과 그로 인한 불만은 내가 나서서 개선할 사항이 아니라 그냥 내게 주어진, 바꿀 수 없는 기본값이었다. 왜?

이 집이 ‘전세’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섯 살 때 이사 와서 올해로 열 살, 5년째 살고 있는 집. 반듯하고 튼튼하게 잘 지어진 집이지만, 이 집에 살다 간 여러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김없이 낡아가는 중이다. 안방 화장실 세면대는 물을 세게 틀면 물줄기 하나가 위로 솟구쳐서 까딱 방심하면 윗옷이 젖는다. 작년 여름 큰 비가 왔을 때 떨어져 나간 베란다 타일은 거무튀튀한 시멘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수도가 동파된 적이 있는지 밸브 주변에 알록달록한 옷가지들을 마구 쑤셔 넣은 보일러실은 이사 온 첫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도 그 상태 그대로다. 이 거슬리는 것들을 손보려고 할 때마다 내 안에서 두 가지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인데, 하나는 순수한 귀찮음이고 또 하나는 ‘내 집도 아닌데, 뭐.’ 하는 구시렁거림이다. 2년이든 4년이든 살다가 계약이 만료되면 나갈 집이기 때문에 내가 굳이 돈을 쓰고 품을 들여서 고치고 가꿔야 하나 싶은 것이다. 그렇게 5년을 살아오다가 바로 얼마 전 1,900원짜리 가제트손을 써보고 그 편리함을 느낀 순간,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왜 여태 이러고 살았지?’ 



‘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휴식, 가족, 안전, 평온, 충전, 자유, 사랑, 평화와 같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들. 우리가 집에 기대하는, 그리고 집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 하지만 한편으로 현대인에게 있어 집은 투자나 투기의 대상이고, 중요한 자산이자 노후대책 수단이며, 사회적 지위를 뽐낼 수 있는 표상으로 기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집 마련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으며 오랫동안 주택담보대출의 무게에 휘청거린다. 내 집’에 대한 집중과 열망이 너무 뜨겁기에 ‘내 것이 아닌 집’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지근하고 무심하기 쉽다. 이곳에는 ‘임시’로 머물고 있다는 생각,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 잘 가꿔봤자 남 좋은 일만 시켜준다는 계산을 암암리에 하게 된다. 내가 바로 이런 계산을 나도 모르게 했었다. 하지만 집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모든 ‘시간’과 ‘경험’을 함께하는 대상으로 보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부동산 계약 조건에 따라 집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가 사는 집이니까 최대한 사랑해보기. 대충 주어진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단 2년을 살더라도 내가 생활하기에 편리하고 쾌적하게 가꾸기. 그러니까 옷걸이가 불편하면 미련하게 참지 말고 곧바로 고치든가 가제트손의 힘을 빌리자는 그런 이야기다.

돌아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스물 한 살, 세상 물정 전혀 몰랐던 나와 친구의 대화. 

나: 대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면 곧바로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고, 서른 살에는 내 집을 살 거야! (참으로 택도 없는 소리였다.)

친구: 와~ 그게 그렇게 빨리 되나?

나: 열심히 벌고 아껴야지. 나는 돈 안 쓰고 가구도 막 비키니 옷장 같은 거 쓸 거야.

친구: 뭐? 왜? 독립하면 드디어 자유인데, 취향껏 예쁘게 꾸며야지.

나: 어차피 코딱지만 한 원룸일 텐데 예쁘게 꾸며봤자지. 그럴 돈 그냥 아끼고 모았다가 나중에 내 집 사면 그때 제대로! 딱! 멋지게! 갖춰 놓고 살 거야.

친구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비키니 옷장 같은 것만 쓰면... 나중에 돈이 있어도 멋진 걸 알아볼 안목이 생길까?”

지금에서야 이 말이 가깝게 와 닿는다. 친구가 옳았다. 취향은 갑자기 바뀌거나 좋아지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기쁨을 느끼는지, 무엇과 잘 어울리는지, 무엇과 함께할 때 평온한지, 나아가 영감을 받고 기운을 되찾을 수 있는지, 이런 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탐색하고 경험해 봐야 알게 되는 것이다. 



복잡하고 경쟁적인 바깥 세상에서 부대끼다 지친 몸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만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좋다. 값비싼 가구를 사들이거나 유행하는 아이템으로 집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건 껍데기에 불과하다. 생활하는 데 있어 불편하고 짜증을 유발하는 게 있으면 고치고, 내 마음을 울적하게 만드는 게 있다면 치우고,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최대한 쾌적하게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다. 가제트손처럼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싱크대가 너무 높아 불편했다면 발판을 사자. 현관 바닥 타일이 낡고 촌스러워서 신발을 신고 벗을 때마다 누추해지는 기분이 들면 당장 시트지를 사다 붙이자. 퇴근하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면 소파 옆을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꾸며보자. 지난 여름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 향이 좋은 아로마 향초, 귀여운 동물 인형 등등 뭐든 좋다. 차 마시는 시간이 가장 고요하고 행복해서 언젠가 나만의 티룸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면, 지금은 비록 부엌 식탁뿐이지만, 그래도 근사한 찻잔 하나쯤은 큰맘 먹고 사보는 건 어떨까? 물론 꿈꾸던 티룸에서 그 찻잔을 꺼내 쓰면 더욱 완벽한 행복이겠지만, 그날까지 기다릴 것 없이 ‘찻잔만큼의 행복’은 미리 당겨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 한번 말하지만 집을 치장하는 데 큰돈을 쓰라고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위해 아끼고 인내하는 사람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집을 대할 때 ‘완벽함’이 아니라 ‘적당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유예하고 있던 기쁨을 조금 더 일찍 맛볼 수 있으리라는 얘기다. 집의 계약 상태가 자가든 전세든 월세든 간에, 지금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애정을 다해 집을 돌보는 태도 그 자체가 우리 생활에 즐거움과 활력을 줄 것이다. 

가제트손의 경험 이후 나는 지저분한 베란다를 싹 치우고, 아이가 유치원 때 사방에 붙여놨던 스티커들을 깨끗하게 떼고, 뚜껑이 달린 라탄 바구니를 주문했다. 이사 가면 주방에 근사한 원목 찻장을 놓고 싶었는데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이고, 일단 차를 보관하는 바구니라도 먼저 싸구려 플라스틱 상자 대신 예쁜 것을 쓰고 싶었다. 요 며칠 주방에 들어설 때마다 단정한 라탄 바구니가 기분을 환하게 밝혀준다. 단지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니라, 차를 좋아하는 내 취향과 차를 마시는 내 시간이 충분히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다시, 나는 지금 전셋집에 산다. 남의 집이라고? 아니, ‘지금 내가 사는 곳’이 ‘나의 집’인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자, 이제 내 집 어디를 돌보고 사랑하고 또 즐겨볼까?



다음 이야기 >>

2화 휘두루마뚜루 집밥 즐기기

3화 실험! 나 혼자 집에서 끝내주게 놀아보기

4화 오늘도 수고한 당신께 - 집에서 잘 쉬는 기술


★마스터 칼럼 후기 댓글 이벤트★

미깡 마스터의 칼럼 정독 후 댓글로 후기를 남겨주세요! 

11/28(월)까지 후기를 남겨주신 집스터 중 한 분을 추첨해 마스터의 저서 '술꾼도시처녀들 1편'을 선물로 드립니다 :)



35

20


이전글
다음글

관련 콘텐츠

꼭 지키는 건강루틴

꼭 지키는 건강루틴

가뿐한끼와 산책하기3

가뿐한끼와 산책하기3

가뿐한끼와 함께 만든 건강루틴-요가 스타트!

가뿐한끼와 함께 만든 건강루틴-요가 스타트!

2024 양말 연말 결산

2024 양말 연말 결산

두 사람을 위한 극장

두 사람을 위한 극장

언젠가 내게 말을 걸어올 물건을 산다

언젠가 내게 말을 걸어올 물건을 산다

팟캐스트 시작했습니다.

팟캐스트 시작했습니다.

가구, 사람 위에 서지 않고 그저 편안한 존재

가구, 사람 위에 서지 않고 그저 편안한 존재

나에게 도착하는, 나를 돌보는 집

나에게 도착하는, 나를 돌보는 집

[’북촌포구집’ 특별편] 제주에 뭘 두고 왔길래 또 갔을까

[’북촌포구집’ 특별편] 제주에 뭘 두고 왔길래 또 갔을까

로그인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로그인
커뮤니티
마이.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