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위한 극장

2024.11.27 10:26조회수 5357

about #라이프집에세이

#라이프집에세이는 개성적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크리에이터의 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면, 라이프집 에세이에서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 writer. 김수진(@movingroom)

큐레이션 서점 어쩌다 책방어쩌다 산책을 운영한다. 책을 매개로 다양한 형태의 공간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방의 가구를 자주 옮기는 탓에 무빙룸movingroom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반복이 그려낼 무늬를 기다리며 매일 성실히 움직이려 한다. 그 이야기를 블로그 <움직이는 방의 이야기>에 기록하고 있다.






©김수진




며칠에 걸친 회의 끝에 뭉툭한 상영 규칙을 만들었다.
화요일은 고전(~1970), 목요일은 모던클래식(1980~1990),
여유가 있다면 주말에는 동시대 영화(1990~)를 추가 상영한다.
그 범주 안에서 최종 상영작은 그날의 기분에 맡긴다.
목록을 만들고 규칙을 정하면서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이 일이
흡사 극장을 운영하는 모양이 되어갔다.
우리는 이 극장에 무빙씨어터Moving Theater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사람을 위한 극장



나는 지난여름부터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래머는 두 명, 관객도 두 명이다. 이 극장은 상영하는 영화보다도 다양한 간식 메뉴로 인기가 많다. 라따뚜이와 파스타, 마라샹궈와 샤브샤브, 갖가지 토핑을 올린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그렇다. 화려한 메뉴를 자랑하는 이 극장은 다름 아닌 우리집 거실이다. 시작은 이름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여러 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감독들이 있었다. 존 포드, 잉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 알랭 레네, 구로사와 아키라. 문장에 낯선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흐린 눈으로 마침표부터 찾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미진한 느낌이 남았다. 작가가 그 영화를 보고 감응했을 무언가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애인에게 영화 보기를 제안했다. 나(프로그래머1)와 애인(프로그래머2)은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보고 싶은 영화들을 적어나갔다. 각자 한 시간 정도 작성한 뒤 서로의 목록을 나란히 두고 보았다. 감독과 영화제목, 개봉년도까지 빼곡하게 적힌 나의 목록과 달리 애인의 것에는 영화의 제목만 단출하게 적혀있었다. 잊고 있었다. 그는 영화 제목만 말해도 감독의 이름뿐 아니라 감독의 탈모 진행 상황까지 꿰고 있는 영화 전공자였다는 사실을. (그게 영화를 전공한 것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목록은 꽤 달랐지만 애써 보지 않으면 볼 일이 없는 영화들이라는 점은 일치했다. 하지만 두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목록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대별 대표작을 볼 건지, 언어권으로 나눌 건지, 계보를 잇는 감독들을 분류할 건지. 며칠에 걸친 회의 끝에 뭉툭한 상영 규칙을 만들었다. 화요일은 고전(~1970), 목요일은 모던클래식(1980~1990), 여유가 있다면 주말에는 동시대 영화(1990~)를 추가 상영한다. 그 범주 안에서 최종 상영작은 그날의 기분에 맡긴다. 목록을 만들고 규칙을 정하면서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이 일이 흡사 극장을 운영하는 모양이 되어갔다. 우리는 이 극장에 '무빙씨어터Moving Theat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상이나 영화를 뜻하는 단어 ‘무빙이미지Moving Image’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무빙씨어터에서는 이미지가 아니라 관객이 움직인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의 길이는 인간 방광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빙씨어터에는 방광의 한계도, 움직임의 한계도 없다. 언제든 화장실에 갈 수 있고 무슨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영화 관계자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영화에 집중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극장의 운영 방식에 개탄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유로움 덕분에 퇴근 후 일과를 지키면서도 수십편의 지루한 영화를 완주할 수 있었다.



©김수진



하지만 이 극장의 최대 강점은 자유보다는 강제성에 있었다. 집에서 영화 보기는 누워서 떡을 먹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만 누워서 떡을 먹다 그대로 잠드는 것도 쉬운 일이다. 이 극장의 상영작들은 애쓰지 않으면 끝까지 보기 어려운 영화들이고 그런 영화들은 보통 3개가 없다. 소리(무성영화), 색(흑백영화), 그리고 재미(!). 언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극장에 한 명의 관객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감독관이 되어 무거워지는 서로의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새벽 세 시, 작은 모니터로 영화를 보느라 구겨둔 몸을 펼치면서 생각한다. 무빙씨어터가 아니었다면 총소리만 들려도 몸서리를 치는 내가 존 포드의 서부극 <수색자>를 볼 일이 있었을까. 초월번역으로 유명한 대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s”를 실제로 확인하겠다고 흑백 멜로 영화인 <카사블랑카>를 끝까지 볼 일이 있었을까. 흐린 눈을 하고 지나쳤던 감독이 내 인생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언제쯤 알게 됐을까. 극장 Theater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테아트론theatron에 있다. 당시 이 단어는 무대나 장소가 아니라 ‘볼 것들‘ 또는 ‘관객’을 뜻하는 용어였다. 어쩌면 극장의 주체는 처음부터 장소가 아니라 작품과 관객에게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린 정말 극장을 만든 걸지도 모른다.



⊹⊹


방의 가구를 자주 옮기는 탓에 ‘무빙룸’이란 이름을 얻은 수진 님은
이번엔 거실에 ‘무빙씨어터’를 만들었습니다.


공간에 쌓이는 우연하고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집에서의 순간도 허투로 보내지 않는 것 같아요!
시간과 공간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듯 
무빙씨어터의 상영표는 거실을 차지한 두 사람에게 분명한 ‘극장’을 만들어줍니다.


집스터 여러분은 집에서 어떤 시공간을 짓고 계신가요?
사랑, 취미, 음식, 기록, 고민 등 일상의 해상도를 한 층 높이는 계단을 우리도 쌓아봅시다!

🏡🧡




Credit

Editor Haeseo Kim

Design Jaehyung Park

Production SIDE Collective

200

731


이전글
다음글

관련 콘텐츠

[어디든.zip] 금수저? 은수저? 난 취향 수저! 커트러리로 취향 탐색, ‘사브르파리’

[어디든.zip] 금수저? 은수저? 난 취향 수저! 커트러리로 취향 탐색, ‘사브르파리’

최애의 노래 기원 겸 팬아트

최애의 노래 기원 겸 팬아트

[어디든.zip] 라이프집 첫 번째 페어, <하우스 아카이브>에 집스터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디든.zip] 라이프집 첫 번째 페어, <하우스 아카이브>에 집스터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블리자드 스토리보드 작가의 드로잉 훈련법, 쿠리타 유이 《카페 스케치》

블리자드 스토리보드 작가의 드로잉 훈련법, 쿠리타 유이 《카페 스케치》

[어디든.zip] 행운템 가득한 새로운 개운 성지, ‘옐로우문’

[어디든.zip] 행운템 가득한 새로운 개운 성지, ‘옐로우문’

📝 [총정리] "비행기표 대신 이걸 택했다고?" 집스터 1,235명이 모은 완벽한 여름 휴가 꿀팁! 🍹

📝 [총정리] "비행기표 대신 이걸 택했다고?" 집스터 1,235명이 모은 완벽한 여름 휴가 꿀팁! 🍹

클라우드 맥주잔과 함께하는 <잔망스러운 콘테스트> 참여 레퍼런스 모음.Zip

클라우드 맥주잔과 함께하는 <잔망스러운 콘테스트> 참여 레퍼런스 모음.Zip

[어디든.zip] 문구 덕후 눈 돌아가는 마스킹 테이프 천국, ‘롤드페인트’

[어디든.zip] 문구 덕후 눈 돌아가는 마스킹 테이프 천국, ‘롤드페인트’

면과 색으로 시선을 훔치는 법, 원근법과 깊이감 마스터 가이드북

면과 색으로 시선을 훔치는 법, 원근법과 깊이감 마스터 가이드북

집에서 보는 ott

집에서 보는 ott

로그인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로그인
커뮤니티
마이.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