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양말 연말 결산

2024.12.26 10:19조회수 5904

about #라이프집에세이

라이프집에세이는 개성적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크리에이터의 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면, 라이프집 에세이에서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 writer. 구달 (@mong_9_dal)

에세이스트이자 24년 차 양말 애호가. 『아무튼, 양말』을 쓴 계기로 삭스타즈에 취직해 5년 째 양말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읽는 사이』(공저), 『읽는 개 좋아』, 『한 달의 길이』 등을 썼다.

 


 

 

©구달

 

 

 

 

보드랍고 알록달록한 양말을 프리즘 삼아
한 해를 찬찬히 되돌아보니,
‘작은 기쁨들을 이삭줍기하며 꽤나 귀엽게 일상을 꾸려왔구나’ 하는 
기분 좋은 안도감이 든다.
올해 나는 행복했을까?
적어도 매일 아침 신중히 양말을 골라 신은 시간의 총합 만큼은 행복했겠지.
하루하루는 평안했을까?
가지런히 정리된 양말 서랍이 평온하고 무사한 일상을 증명하고 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한 해였다.

 

 

 

 

2024 양말 연말 결산

 

 

또 연말이 오고 말았다. 그냥 먼지가 좀 쌓인 건가 싶을 정도로 미미하게 불어난 통장 잔고와 중고 서점에 팔면 최상 등급을 쳐줄 중국어 단어장 한 권과 함께 자괴감에 휩싸여 머리를 쥐어뜯으며 새해를 맞게 생겼다. 33쪽에서 진도가 멈춰버린, 눈처럼 깨끗한 단어장을 꺼내 부랴부랴 한 단어라도 머리에 쑤셔 넣으려던 참이었다. ‘축하와 칭찬’ 코너에서 익혀야 하는 형용사 가운데 두 단어가 나를 멈춰 세웠다. 행복하다. 평안하다.

 

올해 나는 행복했을까? 하루하루는 평안했을까?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단순히 더하고 빼는 식으로 1년을 결산해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양말 서랍을 열었다. 음? 다소 생뚱맞아 보일 테지만, 그날의 일정과 날씨와 기분에 따라 매일매일 신중히 양말을 골라 신는 덕ㅎ… 아니, 사람에게는 양말이 일종의 ‘프루스트의 마들렌’ 역할을 한다. 어떤 양말을 보면 그걸 신은 날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구달

 

 

가령 왼쪽과 오른쪽 발목에 각각 두 개씩 도합 여덟 개의 하트가 그려진 양말. 지난 4월 총선 날 투표를 하러 가면서 우리 사회가 사랑의 그물을 더욱 넓게 펼쳐 소수자를 포용하는 방향을 선택하길 바라며 부러 골라 신었다. ‘And You Have The KEY’라는 레터링이 적힌 양말은 샤이니 키의 솔로 콘서트를 위한 회심의 선택이었다. 그러고 보니 샤이니 응원봉 색깔을 꼭 닮은 민트색 양말은 올해 하도 자주 신어서 앞코가 헤졌다. 멤버 전원이 솔로 앨범을 내고 활발히 활동해 준 덕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만큼은 부족함 없이 가득했던 한 해였구나 싶다.

 

이쯤 밝혀두자면 내 양말 서랍은 4단짜리다. 단이 오를수록 착용 빈도가 높다. 1단에 수납한 양말들(36켤레)은 전부 ‘올해의 양말’ 후보인 셈인데, 지금 보니 유난히 컬러풀한 양말이 많다. 기후 우울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117년 만이라는 11월 폭설을 헤치고 출근하던 날 비장하게 올려 신은 파란색 양말. 자비 없는 빗줄기에 눅눅해진 마음을 말리려 골랐던 노란색 린넨 양말. 하지만 역시 가장 애틋한 건 8월의 불지옥을 함께 견뎌준 진분홍색 시스루 양말이다. 이제 기후 행동 없이는 일상의 안녕을 바랄 수 없다. 발끝으로 그걸 깨달은 해였다.

 

고깔모자를 쓴 복슬복슬 갈색 강아지가 발목에 콕 박힌 양말! 요 녀석한테는 내 친구들을 까르르 웃게 만드는 데 일조한 공을 기려 뼈다귀 모양 메달이라도 걸어주고 싶다. 이 양말을 받고 갈색 털을 살살 쓰다듬으며 즐거워해 준 친구들 덕분에 나 역시 많이 웃었다. “선물은 비어 있는 곳을 향한다. 원을 그리며 돌다가, 가장 오랫동안 빈손인 사람에게로 향한다.” 올해 읽은 《선물》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실은 셀프 선물도 했다. 내 생일은 물론이고 조카 생일 파티, 우리 개 귀빠진 날, 태민의 생일날까지 신었으니 올해의 ‘뽕뽑템’이랄까.

 

그리고 검은색 양말을 신고 치른 온양 할머니 장례식. 할머니를 닮아 동그랗고 순한 눈망울을 가진 친척들이 모여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할머니를 배웅했다. 할머니의 손주들이 낳은 아이들은 화장터를 놀이터 삼아 가까워졌다. 패션 양말은 상복이 되고, 삶과 죽음이 한데 얽혀들었다. 할머니가 떠나시면서 남긴 어떤 의미. 한동안 꼭 붙들고 놓지 못할 듯하다.

 

보드랍고 알록달록한 양말을 프리즘 삼아 한 해를 찬찬히 되돌아보니, ‘작은 기쁨들을 이삭줍기하며 꽤나 귀엽게 일상을 꾸려왔구나’ 하는 기분 좋은 안도감이 든다. 올해 나는 행복했을까? 적어도 매일 아침 신중히 양말을 골라 신은 시간의 총합만큼은 행복했겠지. 하루하루는 평안했을까? 가지런히 정리된 양말 서랍이 평온하고 무사한 일상을 증명하고 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한 해였다. 그러니 남은 연말은 귀여운 춘식이 수면 양말을 신고서 침대에 널브러져 있어도 될 것 같다.

 

하…. 정말 누워만 있고 싶었는데. 발바닥이 도톰한 스포츠 양말을 신고 국회 앞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올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내년에도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겠지만, 아무쪼록 튼튼하고 귀여운 양말로 발끝을 잘 감싸고서 하루하루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구달

 

 

⊹⊹

 

양말 콜렉터 ‘구달’ 작가님의 귀엽고 특별한 연말 결산이었습니다!

 

어떤 소비는 그 의미가 소비에 그치지 않고,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수 있는 증표가 되어주기도 하죠.

작가님의 ’양말’처럼 집스터 여러분들에게도 고유한 족적을 따라가볼 수 있는 작은 수집품이 있나요?

 

댓글로 ‘나만의 연말 결산 품목’을 자랑해 주세요! 🏡🧡

 


 

Credit

Editor Haeseo Kim

Design Jaehyung Park

Production SIDE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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