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룸을 집이자 작업실로 쓰고 계시네요. 일과 생활이 잘 구분되는 편인가요?
처음에는 일도 완벽하고 싶고, 작업환경이 더 좋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힘들기도 했어요. 5년 차가 되니 요령이 생겼죠. 시간이 해결해준다고들 하잖아요. 정말이에요. 시간은 대단한 묘약이고, 경험하지 않으면 몰라요.
일이든 생활이든 힘을 약간 빼는 게 어렵죠.
너무 어렵죠. 수영을 다녀요. 3년을 했는데 아직도 접영을 못하는 게 힘을 못 빼서 그래요. 끝까지 안 빠지는 힘이 있다니까요.
문에 붙여놓은 엽서들은 어떤 작품이에요?
포셋이라고, 오브젝트에서 운영하는 엽서 도서관 콘셉트의 스토어가 있어요. 서브컬처 아티스트와 많이 협업하는데, 그곳에서 제안받아 ‘lmtb’라는 제 프로젝트의 작품들을 엽서로 제작했어요.
반응이 특히 좋았던 엽서가 있나요?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업이요. 타이포는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인간성에 관한 구절일 때도 있고, 제가 쓴 글로 작업한 것일 때도 있어요. 그런 메시지 엽서가 잘 팔린다니 뜻밖이었어요. 사람들이 어떤 '메시지' '철학'에 대한 어떤 니즈가 있다는 거니까요.
이것도(초록과 파랑으로 배를 표현한 ‘Pear’) 본인 작품이죠?
네. 이 것도 인기가 많아요. 요새 단순한 그림에 대한 수요가 생긴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런 미니멀한 제 그림을 좋아해요. 그림을 이렇게 단순하게 그리는 이유는 ‘인생은 이렇게 복잡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림만은 단순했으면 좋겠다 ’거든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맘 속에도 단순함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서울옥션에 그림 두 점을 출품하게 된 걸 보니, 미술 컬렉터들에게도 이런 작품에 대한 수요가 생기고 있나봐요.
서울옥션엔 어떤 그림을 출품하나요?
체리를 그린 ‘lover’와 ‘LOVE CONQUERS ALL’이에요. ‘lmtb’시리즈의 타이포그래피 작품이에요. 이번 서울옥션 전시가 타이포그래피 작업물 기획전이거든요.
작가님은 ‘lmtb’ 프로젝트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죠. 그 시리즈는 어떻게 시작하게됐나요?
클라이언트 작업을 주로 하다 보니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직접 그림을 팔아보자’ 해서 시작한 예술 프로젝트예요. ‘lmtb’는 ‘less make things better’의 약자고요. 한 달에 한 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양만 제작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즐기고 향유할 수 있도록 선보이도록 한 거죠. 이 프로젝트를 보고 포셋과 서울옥션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사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어디든 좋은 방향으로 갈 거라는 생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이죠.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나요?
클라이언트 작업을 하다 보면 에너지를 많이 써요. 개인 작업을 할 여력은 별로 남지 않게 되는 거죠. 조금 남은 에너지로 메시지를 담아내면, 이렇게 심플한 그림이 나와요. (웃음) 그래도 이건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에요. 제 그림을 봐주는 사람도 그걸 자연히 느끼는 것 같고요. 그림이라는 게 참 신기한 거 같아요.
작업 도구는 어떤 걸 써요?
초반에는 색연필로 그렸어요. 지금은 아이패드로만 그려요. 어도비의 프레스코 프로그램을 쓰는데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와 연동이 잘돼 편리해요. 저는 기술에 관심이 많아요. 하나의 레이어 안에서 여러 색이 섞이는 기술 같은 걸 보면 신기해요. 이런 취향 덕에 어도비와 프로젝트도 여러 번 했어요.
재미있네요.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만든 디지털 작업은 외려 아날로그에 가깝다는 게요.
맞아요. 소프트웨어 역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이 만든 일종의 작품이자 결과라고 생각해요. 전통적으로 미술에 쓰이는 아날로그 재료보다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도 훨씬 덜해요. 버리는 쓰레기가 줄고, 필요한 그림만 출력할 수 있고요. 그러니까, 소프트웨어는 이제 미술 도구 의 일종이 됐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그림을 말고 다른 걸 해볼 생각도 있나요? 2D에서 3D로 확장한다거나….
그럼요. 서브스턴스를 배우려고 해요. 제 그림처럼 단순한 그림을 3D화하면 재미있는 게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저 가상현실에도 관심이 많아요. 앞으로 여러 기술과 결합해서 재미있게 작업하고 싶어요.
작품 활동하기 전에는 뭘 했어요?
교육학을 전공하고 5년간 직장 생활을 했어요. 중간에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 시드니 애플 스토어에서 일하고, 귀국 후엔 애플 코리아 신생 팀에서 직원을 위한 뉴스레터나 굿즈 제작을 했죠.
그때도 그림을 그렸나요?
취미 정도 였어요. 블로그에 기록하고 있었거든요. 어느날 그걸 본 잡지사의 에디터에게서 연락이 왔고, 삽화를 싣게 됐어요. 잡지 한구석에 조그맣게 제 그림이 실렸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짜릿했어요. 퇴슬 결심한 후엔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독립 출판 강좌를 들으면서 재취업을 준비 했었는데요. 이상하게도 취업보다는 독립출판물이 잘 되는 거예요. 여러 협업과 더 많은 작업을 하게 되면서, 자연히 작가가 됐어요.
아이디어가 금방금방 떠오르는 편이에요?
네. 새로운 걸 워낙 좋아해요. 어릴 적부터 누군가와 똑같은 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는 거예요. 다름에서 오는 재미를 찾다 보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아요. 책 읽는 것도 좋아해요.
어떤 책을 주로 읽어요?
닥치는 대로 읽어요. 최근에 <돈의 속성>을 읽었어요. 은은한 감동이 있는데 인사이트도 있더라고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도 재밌게 읽었고요. 지혜로운 공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에요.
정말 다양하네요. <돈의 속성>에서 영감받은 작품도 언젠가 나올까요?
머니 드로잉, 좋네요.(웃음) 저는 아티스트가 물질적인 걸 추구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쪽이에요. 일종의 그림 노동이니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죠.
슬럼프가 올 땐 어떻게 해요?
당시엔 몰랐는데 작년에 번아웃이 제대로 왔나 봐요. 올 초에 태국, 캄보디아로 워케이션을 다녀왔어요. 치앙마이에서 너무 좋았어요. 여기 이 모빌도 치앙마이 소수민족이 만든 거고, 문에 걸린 천도 치앙마이 야시장에서 산 거예요. 힘들 때는 치앙마이를 가자, 그런 생각을 해요.
기업과 협업을 많이 하는데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휠라키즈와 협업한 의류 라인이 ‘휠라키즈 X 수수진’이라는 이름으로 5월에 론칭해요. 조카가 저의 첫사랑인데, 그 조카를 생각하며 한 작업이에요. 제가 만든 패턴을 적용한 귀여운 옷이 나올 예정이에요.
협업할 때 중시하는 게 있나요? 파트너를 선택하는 기준이라든지.
개인을 소외시키는 작업은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해요. 대기업과 개인 사업자 간에 절대 구분을 두지 않아요. 전부 다 똑같은 에너지를 들여 작업하고. 제 그림이 나중에 어디에 걸린다 해도 저는 저고 우리는 다 같은 개인이니까 서로서로 연합하고 배려해야죠. 콧대 높은 아티스트는 되고 싶지 않아요.

개인 작업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을까요?
‘Love Conquers All’이라는 메시지로 전개한 작업들이 저에게 큰 의미가 있어요. 제가 사랑이나 하트를 많이 그리는데, 하트를 그리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작품 활동에서 사랑이 큰 부분을 차지하나요?
가장 커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사랑요. ‘작가는 사회에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박완서 작가가 말씀하셨잖아요. 거기에 공감하고, 또 동참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이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겠어요.
그렇죠. 저를 사랑해주는 친구들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조카, 동생도 있고, 다행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만일 신이 빛으로 존재한다면 지금 여기 있는 거 잖아요. 제겐 늘 있어요. 알람 없이 살아도 되는 게, 이 집에 빛이 들어오면 눈이 저절로 떠지거든요.
에세이 제목대로 실제로 알람 없이 사는군요.
밤샘 작업을 안 해요. 졸리면 빨리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하는 게 더 건강하더라고요.
그럼 언제쯤 일어나요?
8시 반에서 9시쯤 일어나요. 아침 먹고 커피 마시고, 요즘은 사과 식초를 물에 희석해 마셔요. 그리고 성경 필사하고 일을 시작해요. 오전에 이메일 업무를 하고 그 후에 그림 작업을 하죠. 도저히 집중이 안되는 날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한강 가거나 미술관에 가요. 구슬도 꿰고요.
자주 가는 미술관이 있어요?
서울시립미술관 잘 다니고 성곡미술관도 좋아요. 미술 시장 조사차 작은 갤러리도 찾아다녀요.
그런 와중에 ‘lmtb’ 프로젝트는 개인 작업을 하도록 일종의 강제성을 주겠네요.
그렇죠. 즐겁게 작업하는 원동력이 돼요. 제 루틴 중 하나가 일주일에 한 번씩 블로그에 위클리 기록을 쓰는 거예요. 2019년 즈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어요. 남이 만든 규칙에는 잘 적응 못하는데 스스로 만든 규칙에는 즐겁게 참여해요. 프리랜서이다 보니 나만의 규칙과 루틴이 주는 안정감이 있어요. ‘lmtb’ 프로젝트가 저에게 그런 것 같아요.
주체적인 생활이군요.
내가 만든 규칙을 따르는 게 재미있어서 알람 없이 사는 것 같아요. 알람 없이 산다는 건 느긋하고 헐렁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열심히 사는 거거든요. 그 재미를 찾고 나면 그 후에 따르는 보상은 다 내 것이 되죠.
작가님 작품을 보면 색깔이 돋보여요. 좋아하는 색이 있나요?
초록이랑 파랑요. 그래도 모든 색깔을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