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이 ‘집으로 쓰는 작업실’이라고요.
어서 오세요. 네, 맞아요.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신혼집은 삼성동에 있고 본가는 안양이에요. 안양에서 여기 연남동 작업실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죠. 이곳을 구한 지는 3년 됐고요.
왜 연남동이었어요?
제가 2호선 집착증이 있거든요.(웃음)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지나온 동네가 홍대, 성수, 합정, 강남이더라고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안에 축적된 데이터가 2호선 지하철역 동네에 있으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요.
집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집이 작업실’이라고 해서 내심 놀라긴 했어요.
저에게 집이란 침실과 부엌, 거실이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안양의 본가는 엄밀히 말해 부모님 집이잖아요. 물론 편하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편하지는 않아요. 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잔소리도 늘 있고요.(웃음) 근데 여기는 저만의 공간이잖아요. 더 있고 싶고, 뭐든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곳이죠. 그래서 ‘집’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작업실이 먼저 떠올랐어요. 여기서 친구들 불러 놀기도 하고 잠도 자고요. 대학 다닐 때 워낙 야간 작업을 많이 해서 작업실에서 자는 게 익숙해요.
1층의 매력이 있어요. 동네 사람들 지나다니는 게 훤히 보이네요.
지도 보고 오셔서 아시겠지만 이 동네가 경의선 숲길과는 거리가 조금 있고 카페나 맛집이 즐비한 번화가까지 걸어서 5분 정도 걸려요. 그래서 한적하고 조용하죠. 저녁에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밖에 안 들려요. 이곳에 앉아 동네 사람들 출퇴근하는 모습만 봐도 뭔가 안정된 기분이 들어요. 그분들에게 이곳은 뭐 하는 곳인가 싶은 수상한 장소일 테지만.(웃음) 궁금해서 들어오는 어르신도 있어요. “여기 뭐 하는 데요?” 한껏 동그래진 눈으로 물어보시죠.
보통 여기서 얼마나 머무르나요?
요즘엔 아침 운동을 시작해서 출근 시간이 조금 늦어졌는데 보통 오전 10시에 도착해요. 문 열고 환기 한번 싹 하고 수업과 쉼을 반복하죠. 수업이 없을 때나 끝나고 난 저녁이면 이웃 동료들과 모여 놀기도 하고, 혼자 창 쪽을 보고 앉아 작업을 하기도 해요. 글씨 쓰는 것 외에 유튜브 촬영이나 편집도 하고요.
집에서 즐기던 취미가 업이 되었다고 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프리랜서가 되기 전까지 인사동에 있는 도장 전문 디자인 회사에 다녔어요. 안양에서 인사동까지 매일 출퇴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침 7시에 눈뜨기 무섭게 출근하고 저녁 9시에 집에 도착해서 자기 바빴어요. 그 와중에 대학교에서 배운 서예를 까먹는 게 아쉬워 뭐라도 해야겠다고 시작한 게 캘리그래피였어요.
서예가 아니라 캘리그래피를요?
서예를 하려면 화선지도 펴야 하고 먹물도 필요하잖아요. 근데 방에서 그런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가 쉽지 않으니 남는 선택지가 캘리그래피더라고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잠자기 전에 딱 30분만 하자고 생각했어요. 근데 웬걸, 막상 시작하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 가서도 점심시간에 빨리 도시락을 해치우고 캘리그래피를 했어요. 퇴근 후 집에 가려면 길이 막혀 오래 걸리니까 근처 카페나 공원 벤치에서 한참 글씨를 쓰다가 집에 가기도 했어요.
뭐가 그리 재미있었어요?
기술이 느는 게 보였고요, 무엇보다 인스타그램에 캘리그래피 작업을 게시했을 때 친구들이 “너무 예쁘다”, “나도 써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쓸 수 있어?” 하고 반응하는 게 즐거웠어요. 그때가 2013년쯤이었는데 한창 너도나도 인스타그램에 가입할 때였거든요. 덕분에 제 취미 생활을 즐겁게 키워갈 수 있었죠. 신기해요. 사실 회사에는 이런 취미가 있다는 걸 비밀로 하고 싶었거든요. 동료들이 뭐 하냐고 물어볼까 봐 종이에 가슴팍을 딱 붙이고 몰래몰래 쓰고 그랬는데.(웃음)
어떤 글을 자주 썼어요?
당근 연애 이야기죠! 근데 막 풋풋한 시작보다는 애절한 이별에 대한 글이 반응이 더 좋았어요. 좌절과 슬픔, 아픔, 그리고 다시 극복하는 서사에 많이들 감정이입을 하더라고요.
출간한 책 <퇴근 후 손글씨>도 그런 경험담을 쓴 책인가요?
정확하게는 출판사의 ‘퇴근 후’ 시리즈물이었어요. 그렇지만 물론 저의 경험담과 노하우를 풀어냈죠. 사실 그맘때 여기저기서 출간 제의가 들어왔는데 확신이 없어서 결정을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때마침 저의 첫 제자들을 만났는데 제가 그들에게 알려준 노하우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제야 책을 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그랬군요. 진짜 퇴근 후 손글씨를 써서 이 자리까지 온 거니까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씻고 제 방에 들어가면서 엄마한테 이렇게 말해요. “나 오늘 글씨 쓸 거니까 아무도 말 걸지 마.” 그리고 방 조명 끄고 스탠드 딱 하나 켜놓고는 음유시인인 양, 대작가인 양 골몰하죠.(웃음) ‘오늘 뭘 쓰지?’ ‘어떻게 쓰지?’ 이게 제일 재미있는 고민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었어요?
이어폰을 끼고 그때그때 화제성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들었어요. ‘들었다’고 표현한 건 정말 눈으로 본다기보다 대사 하나하나를 듣고 메모하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에요. 노래도 많이 들었어요.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일 것 같은데, 가장 아끼는 펜은 뭐예요?
모나미 플러스펜이요. 보통 흔해서 관심을 갖지 않지만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은 펜이에요. 두껍게도 가늘게도 쓸 수 있죠. “모나미로 쓴 거야”라고 말했을 때 “거짓말하지 마”라는 반응을 즐겨요. 사실 장비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무조건 많이 쓰는 게 답이에요. 캘리그래피가 좋은 게, 별도의 도구 없이 마음먹은 그 자리에서 시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 방의 취미 공간도 얼마나 단순한데요. 침대 앞에 책상 겸 화장대가 있는데 그 위에 올려둔 작은 잉크젯 프린트 1대와 이케아 4단 트레이가 다예요. 종이는 책상 밑 발치에 두고 꺼내 쓰고요.
그래도 펜마다 느껴지는 각기 다른 감각이 있잖아요.
물론 그렇죠. 그런 면에서 이야기하면 전 해외여행 갈 때 각 도시의 문구점에 가는 데 꽂혀 있어요. 희귀한 펜을 만나는 재미를 즐기는 거죠. 언젠가는 펜을 한 무더기 사 오다 공항에서 가방 검사를 받은 적도 있어요.
장비는 취미 활동하는 맛을 더욱 북돋우죠.
아, 맞아요! 생각해보니까 업그레이드한 장비가 있어요. 캘리그래피를 쓰는 것도 그렇지만 이걸 예쁘게 찍어 공유하는 재미도 있거든요. 제 책상은 연식이 오래돼 사진을 어떻게 찍어도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흰 테이블과 화이트 빛 조명, 그리고 같이 찍으면 분위기가 업되는 스테이셔너리와 작은 소품을 샀어요.
글씨를 잘 쓰는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타고난 악필이었어요. 정말, 진짜로요! 얼마나 악필이었냐 하면, 제가 주소를 손으로 써서 택배를 보낸 적이 있는데 택배받은 분이 “희경 씨, 많이 바빴나 봐. 다른 사람이 보냈네”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글씨를 전문적으로 쓰냐고요? 그건 신경 쓰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이렇게 써야겠다고 구상하고 의식하면서 글씨를 써요. 이 작은 태도가 큰 차이를 만들어내요. 글씨 한번 쓰고 나면 배가 다 고프다니까요.
요즘에는 무엇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어요?
기록을 시작했어요. 점점 까먹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서 그게 아쉬워 시작한 일이에요. 저는 일기라고 부르지만 남들이 볼 때는 메모에 가까울 거예요. 그렇지만 주눅 들지 않죠.(웃음) 하루 동안 생각한 것, 느낀 것을 모으면 일기 아니겠어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요.
캘리그래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 같아요.
맞아요. 달라요, 달라. 사실 캘리그래피를 하면서 ‘현타’ 오는 순간이 있었거든요. 어디서 좋다는 글, 예쁘다는 글을 발췌해 제 손으로 쓰고 보여주는 것은 재미있으나 딱 거기까지더라고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내 말을 써야겠다’ 하고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거예요.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식으로 기록해요?
기록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으니까 사실 매번 ‘뭐 쓰지?’ 이 문제가 어려워요. 그래서 일단은 가볍게 접근해요. 오늘 먹은 걸 적을 때도 있고 누굴 만났는지를 적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 하나씩만 덧붙여요. ‘여기서 이 음식을 먹었는데 그게 생각나더라’ 하는 식으로 살을 붙이죠. 단어로 시작하지만 이게 곧 문장이 되고 또 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에 쓰나요?
카카오톡 ‘내게 보내기’에 씁니다.(웃음) 시간을 정해놓지도 않았어요.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어떤 생각이 들 때 이걸 남기고 싶다는 느낌이 들면 써요.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건 너무 무게 잡지 않는 거예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다이어리의 촘촘히 구획된 칸이 부담스럽거든요. 왠지 다 채워야 할 것 같고, 못 채우면 실패한 것 같은 느낌, 저만 그런가요? 그래서 저는 실물 다이어리는 최대한 늦게 사려고 해요. 다 채워야 한다고 느끼면 일이 되고, 일이 되면 하기 싫잖아요.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하군요.
맞아요. 즐기는 게 제일 중요해요. 캘리그래피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소중해요. 사실 캘리그래피가 제 업이지만 다시 취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 한들 그 기반에 ‘내가 즐겁게 했던 기억’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 두렵지 않아요. 저는 지금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오히려 더 부지런하게 살게 되고요. 내가 좋아하는 이걸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글씨란 게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누구도 같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글씨 쓸 일이 많이 없잖아요. 마음먹으면 하루 종일 펜을 안 잡을 수도 있죠. 아마 코로나19 대유행 때 많은 사람들이 내심 부끄러워하며 출입자 명부를 썼을 거예요. 어디 갈 때마다 일행이 저한테 쓰라고 미루고 그랬어요. 저는 모든 매체가 디지털화되어도 글씨를 잘 쓰는 것, 한 걸음 나아가 나만의 스타일로 글씨를 표현하는 멋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참, 활동명 ‘손끝’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요.
모든 일은 손끝에서 이뤄지더라고요. 글씨 쓰는 것부터 하물며 글자 수 세는 것까지.
글자 수를 세서 글씨를 쓰는군요?
어떻게 글자를 배치할지 계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처음과 마무리가 모두 손끝에 달렸다는 생각에서 손끝이라 이름 지었어요.
서예학을 전공한 것 말고 더 먼 과거를 회상했을 때 캘리그래피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질문하시니까 생각난 건데 외할아버지께서 서예를 좋아하셨어요. 우리 집안에 글씨 쓰는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며 자식들 결혼할 때 문방사우 세트를 선물하실 정도였죠. 집에 아직도 있어요. 어릴 때 용벼루라고 이름도 지었는데, 하여튼 그만큼 당신께 중요한 가치였어요. 그래서 어릴 때 외할아버지께 예쁨받으려고 붓을 잡곤 했죠. 와, 그때 그렇게 시작한 게 지금 제 모습을 만들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