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을 배운 적 있나요?
친구가 운영하는 페인팅 원데이 클래스를 한 번 수강한 게 전부예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 없어요.
그런데 두 번의 개인전까지 열었어요. 원래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무언가 표현하고 싶었던 시기와 잘 맞았다고 생각해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의 황보정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4년 전 갑작스레 동생이 세상을 떠났어요. 많이 괴로웠어요. 나만 살아 있는 게 미안했고요. 저는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어요. 대체로 술 마시는 일로 시간을 보냈어요. 어느 날 저를 안타깝게 여기던 친구의 권유로 페인팅 클래스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5시간 동안이나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게 감정을 다스리는 데 굉장히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몇 주 후 무작정 붓과 물감, 캔버스를 사서 무언가 그려보기 시작했어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어떤 변화가 생겼어요?
어떤 감정이 휘몰아칠 때 거기에 휩쓸리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게 됐어요. 캔버스 앞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흠뻑 빠져서 몰입했죠. 눈에 띄는 색 서너 가지를 손에 쥐고는 마음 가는 대로 마구 그렸어요. ‘어떻게 그려야지’, ‘뭘 표현해야지’ 같은 구상 같은 건 없었고요. 신기하게도 이러면서 저의 상태가 점점 호전됐어요. 일상적 우울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 먹구름 낀 하늘 같았던 마음에 해가 조금씩 들어왔어요.
이런 과정에서 첫 번째 개인전 <감정선>에서 선보인 작업들이 탄생한 거군요.
맞아요.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 우리 둘이 공유했던 추억 같은 걸 되새기며 그린 그림을 모아 작은 전시를 열었어요. 첫 번째 전시 때 어떤 이들은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게 아니다’라는 코멘트를 해주기도 했어요. 컬러와 형태의 배치에 대한 구상이 있으면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전공자가 아니고, 그냥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몰입하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요. 그래서 그 말은 듣지 않기로 했어요.(웃음) 무엇보다 첫 전시는 그간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편지 같은 것이었고,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했어요.
벌써 1년반이나 취미로 그림을 그렸어요. 시작할 때와 비교해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처음에 그린 그림은 주로 회색, 파란색, 보라색, 검은색을 쓴 추상화였어요. 올해 들어서는 노랑, 분홍, 흰색을 많이 쓰게 됐어요. ‘현생’과 ‘집생’을 동시에 사는 루틴도 생기고, 그 안에서 휴식하는 방법도 배운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며 만든 작업실에서 황보정은은 어떤 성격의 사람인가요?
모델로서 촬영장에 있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저는 굉장히 밝은 사람이에요. 서로를 에너지원으로 일하는 현장에서는 서로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저 또한 그런 사람으로 있는 것이 편해요. 집에 온 저는 굉장히 정적인 사람이 돼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앞으로 해나갈 작업의 레퍼런스를 살펴보면서 고요히 시간을 보내요. 밖에서 만난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놀랄 때가 많아요. ‘정은이 너는 집에서 보니까 정말 딴 사람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어느 쪽이 더 자신에 가깝나요?
집에 있는 저로 사는 게 더 저다운 것 같아요.
취미 루틴은 어떻게 유지하고 있나요?
일정이 없는 날 밤에는 거의 그림을 그려요. 새벽 시간이 가장 몰입이 잘돼요. 밤 10시부터 새벽 4~5시까지가 적당해요. 너무 늦게 잠들면 낮에 비몽사몽이니까 해 뜨기 전에는 잠을 잔다는 저만의 규칙이 있어요.(웃음)
그림 그릴 때 몰입을 돕는 나만의 아이템이 있나요?
화실에 들어가기 전에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봐요. <미드나잇 인 파리> <이터널 선샤인> <노팅힐>처럼 화면과 현실 사이에 엷은 장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를 좋아해요. 또 작업에 들어갈 때 주로 화이트 와인을 챙깁니다. 너무 비싼 건 필요 없고 편의점에서 파는 2만~3만 원대 와인을 마셔요. ‘더 롱 독 블랑’이 제가 추천하는 ‘몰입 와인’이에요. 그리고 저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잔 없이 병째 마시는 거예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때 술보다는 ‘멋진 예술가처럼 그림을 그리는 나’에 취하거든요. 내가 나를 멋있게 여기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웃음)
가장 아끼는 작품은 뭐예요?
첫 전시의 주제작이기도 했던 ‘술취화’예요. 가로세로 각각 1m가 넘는 큰 화폭이었는데 몇 날 며칠을 울고 화내면서 완전히 몰입해서 그렸어요. 가장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그림이기도 하고 저 역시 자랑스러워하는 작품이에요.
조금 우울해 보이는 푸른빛을 많이 쓴 것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이에요.
그렇게 완성이 되더라고요. 그림 그리는 내내 감정을 너무 많이 소진했고, 끝내는 그 감정을 보내면서 끝이 났어요. 다시는 그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꼭 필요한 화구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쉴드사에서 나온 아크릴물감, 3호 빽붓(납작붓)은 저 같은 비전문가도 쉽게 구하고, 또 편하게 쓸 수 있어서 애용해요. 그리고 다이소 분무기도 제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더 고급스러운 분무기도 있을 텐데요.
저는 아크릴물감을 캔버스에 바르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서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둔 다음 물감이 마르면 그 위에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서 질감을 내요. 좋다는 분무기를 여럿 써봤는데, 너무 고르게 분사되거나 반대로 물방울이 많이 튀어요. 다이소에서 파는 분무기처럼 좋은 게 없더라고요.
다이소 외에 화구를 어디서 구매하나요?
저는 화방보다는 인터넷을 이용해 구매하는 게 좋아요. 배송이 빠르고, 가격이 합리적이고, 많은 종류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요. 주로 쿠팡같은 커머스를 이용하는 편이에요.
이렇게 그림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성장하는 황보정은을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요.
가족에겐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 그림이 유명해지면 이야기할래요. 아직은 적당히 숨어 있는 집생이 좋거든요. 모델 일 하고 그림 그리는 작업까지 하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게 잘되면 말하고 싶어요. 요즘 한국적 영감으로 작업을 이어나가는 아티스트들이 모인 크리에이터 그룹 ‘무낙’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저만의 브이로그도 준비 중이니 기대해 주세요.
가까운 목표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먼 목표도 이야기해 주세요.
네이버에 제 이름을 검색하면 직업이 3-4개쯤 나왔으면 좋겠어요. 모델, 크리에이터 그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림이 제 중심으로 들어오면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를 설명하는 여러 해시태그 중 하나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