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살이보다는 좋아하는 것만 모아놓은 집이네요. 혹시 첫 독립 공간인가요?
네. 서른을 앞두고 부모님이 갑자기 귀농을 하시면서 본의 아니게 독립을 하게 되어 현재 4년차인데요, 여기는 원래 살던 동네고 친구들도 그대로 있어요.
‘혠바’도 독립하면서 시작한거죠? 여기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맞아요. 사실 부모님과 살 때 퇴근 후의 집은 그냥 쉬는 곳이었어요. 요리를 좋아했지만 그때는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거든요. 지금처럼 재료를 샀다가는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겠죠. 또 그릇들도 부모님 취향이었고요. 독립하고 나서 요리가 제대로 된 취미가 됐어요. 만든 음식들을 예쁜 접시에 담아 인증샷도 찍고, 친구도 초대해 맛보게 해줄 수도 있는 내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 거죠. 밤이라는 시간을 새로운 하루처럼 살아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주로 어떤 음식을 만드나요?
저는 계절이 담긴 요리를 굉장히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만든 책도 계절과 관련된 요리책이 많아요. <사계절 홈 레스토랑> <사계절 아이 간식> 처럼요. 계절이라는 테마를 담기에 칵테일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본기와 클래식한 몇가지 종류를 익히고 나면, 마음대로 레시피를 변주할 수 있거든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텃밭 채소로 요리해 먹는 감성을 좋아하다 보니 채소의 매력에 빠졌어요. 채소는 제철이 있잖아요. 종류도 굉장히 다양하고 조리 방식에 따라 맛도 다채롭고, 자연에서 난 그 자체로도 예쁘기도 하고요.
칵테일과 제철 채소 안주라, ‘계절밤’이라는 블로그 제목이 이해는군요.
고요한 밤에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술 한 잔을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정말 좋아해요. 낮 동안 직장인으로서 일을 한 후 밤에는 계절을 누리며 취미생활을 한다는 스토리도 담고 있고요.
채소 안주라는 건 비건 음식인가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물어보는데 아니에요. 콘텐츠들을 모으다 보니까 채소요리가 꼭 슴슴한 ‘건강식’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정말 짭조름하거나 맵게 하거나 해산물이나 육류랑 조합하는 방법도 있고요. 그냥 계절 채소가 주인공이 되는 간단한 음식이에요. 제가 딱 좋아하는 ‘무게감'이 있거든요.
무게감이요? 와인의 바디감 말하는 건가요?
비싸고 좋은 재료를 기본으로 최고의 스킬이 더해진 ‘파인다이닝’을 일상에서 도전할 순 없잖아요. 대신 익숙하고 아는 맛이지만 약간 다른 맛, 와인바에서 만날 수 있는 캐주얼한 한 접시 안주 같은 게 제가 편하게 즐기고 해봄직한 메뉴더라고요. 예를 들어 멸치볶음인데 부추를 듬뿍 넣은 안주라던가, 사리곰탕에 매생이를 올린 음식 같은 것들이요. 부추, 매생이, 미나리 등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제철 채소잖아요. 평범한 안주에 다양한 채소로 약간의 창의력을 더하면 색다른 맛이 나죠.
편집자의 집답게 요리 서적이 많아요. 메뉴에 대한 영감을 위해서인가요?
취미나 모든 걸 책으로 배우는 편이기는 해요. 하지만 오늘 어떤 음식을 만들지는 더 다양한 루트로 얻습니다. 평소에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색다른 아이디어가 느껴지는 메뉴들을 보관함에 습관처럼 모아두어요. 비주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많아 핀터레스트에서 이미지를 수집하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바가 있어요? 나에게 영감을 주는 선생님 같은 곳이요.
컨셉이건 맛이건 한끝 차이, 사소하지만 색다르게 접근한 공간을 참 좋아해요. 컨셉을 좋아하는 공간은 합정동에 있는 ‘문학살롱 초고’에요. 책을 보면서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인데, 꼭 책을 읽지 않아도 분위기 자체가 편안해요. 칵테일 자체를 좋아하는 바는 은평구에 위치한 기슭이요. 배우려는 자세로 친구와 함께 가서 서로 다른 종류를 시켜 6잔이나 마셨는데, 전부 익숙하면서도 신선했어요.
마신 칵테일을 집에 와서 다시 만들어보려면 잘 기억이 안 나잖아요.
바에서 경험한 맛과 특징을 인스타그램에 간단하게 짧게 기록하고, 바텐더들이 레시피를 설명해주면 메모장에 적어와서 따로 칵테일 레시피 노트에 기록해요. 그렇게 1년 정도 기록했더니 만들 수 있는 메뉴가 제법 다양해졌어요.
칵테일 만들 때 갖춰야 할 게 많지 않나요?
칵테일 도구는 처음부터 세트로 구입했어요. 셰이커, 음료를 계량하는 지거, 바 스푼, 찌꺼기를 걸러내는 스트레이너 등이 기본이죠. 베이스가 되는 술이나 시럽은 만들고 싶은 칵테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둘 구비했고요.
스스로 생각했을 때 성공적인 칵테일과 채소 안주가 있다면요?
가을의 시그니처 세트인 배 진피즈와 무조림이요! 진과 소다수를 혼합해 톡 쏘는 맛의 진피즈에 강판에 간 배를 첨가해서 만들어요. 갈아넣은 배가 슬러시처럼 시원한 느낌을 내고 설탕 대신 단 맛을 추가하죠. 여기에 짭조름한 무조림이나 고소한 버섯볶음을 곁들이면 정말 잘 어울리죠.
또 여름밤 칵테일이라는 것도 만들었는데요, 냉동 블루베리에 설탕을 섞어서 간단하게 만든 다음, 조각달 모양의 레몬과 스피아민트로 장식해 여름 바람 같은 느낌을 준 것도 있어요.
레시피 하나하나를 꼼꼼하게도 적어놨네요. 블로그도 운영하시죠?
칵테일과 채소 안주를 만들고 나면 그때그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고,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정도에 블로그에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어요.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쓰려고 하는 편이지만, 너무 강박적으로 루틴을 지키지는 않으려 해요. 계획대로 수행하려기보단 실제 내가 기록하기를 즐기고 있는지 늘 촉각을 세우고 있어요.
기록하는 게 의무가 될까봐 경계하는 거군요?
제가 뭐 하나를 시작하면 과몰입하고 너무 열심히 하는 성향이에요. 처음에는 유튜브를 하고 싶어서 카메라랑 삼각대도 구비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행복하지가 않더라고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집착을 하게 된 거죠. 혠바는 퇴근하고 가볍게 진짜 즐기려고 시작한 취미인데, 기록 자체가 일이 되니 스스로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힘을 뺀 기록을 하기 위해 시작한 게 블로그에요. 인스타그램에는 한정된 사진, 축약된 글로 기록을 하다 보니 사진을 고르고 멘트를 쓰는 게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있더라고요. 하나의 게시글로 올릴 정도의 일상은 아니지만, 기록은 해 두고 싶은 자잘자잘한 별거 아닌 이야기거리가 많은 편이라 블로그에 주간일기를 쓰는 재미에 푹 빠졌답니다. 사진이 별로여도, 글을 잘 못 써도 부담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기록을 할 때의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기록을 하다보면 일상을 잘 가꿔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또 취향이 맞는 분들과 소소하게 연결되면서 그 좋아하는 마음이 넓고 깊어져요. 기록을 꾸준히 하다 보면 기록할거리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도 재밌어요. 귀여운 시선을 갖게 돼 별거 아닌 것들이 의미 있게 보일 때가 많답니다. 그런 것들이 삶을 꽤 즐겁게 만들어줘요.
이 혠바에서 ‘취향수집클럽’도 운영하고 있어요. 어떤 모임이에요?
‘남의집 프로젝트'를 통해 신청자 3명을 모집하고 있고요, 함께 모여 좋아하는 것들을 서로 공유하는 모임이에요. 제 취미를 나누고자 채소안주와 칵테일을 제공하고요. 각자 좋아하는 책, 영상, SNS 콘텐츠를 준비해오는데, 모임 전에 본인의 취향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해볼 수 있도록 세세한 가이드가 되어주어요. 책은 조금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아이템이고, 영상은 조금은 가볍게, SNS콘텐츠는 더욱 가볍게 생각해볼 수 있는 취향이라고 생각했어요.
굳이 모르는 사람의 취향이 궁금한 이유가 있을까요? 모임을 시작한 계기가 뭐예요?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동료랑 인스타 게시글을 추천해주곤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웠어요. 그 친구는 실용서나 에세이를 좋아하는 저와 달리 책도 문학 위주로 읽고, 술이나 안주보다는 커피와 디저트를 좋아하는데 서로 이야기하면서 다른 분야의 관점을 알아가고 공통점을 나누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제가 평소에 책 기획을 위해 콘텐츠를 정말 많이 수집해두거든요. 그중에서 책으로 발전되지 못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도 했고요. 상대방이 관심 갖는 세계를 깊어지고 넓어지게 하는데 보탬이 되는 연결자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와 좋은 콘텐츠를 연결하는 편집자의 업무를 일상으로 가져오고자 한 것이네요.
아, 처음에는 제가 소개하는 기쁨이 더 컸는데 사실 모임을 지속하면서 저 역시 새로운 영감을 더 많이 얻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늘 취미가 있었고,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일도 적성에 잘 맞는 편이라 다른 세계에 대한 탐구를 잘 안했던 것 같아요. 제가 들여다 보는 세계가 대세고, 다들 좋게 본다 여겨왔는데 취향수집클럽을 하면서 그 세계에 갇혀 있었다면 보지 못할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이런 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나랑 비슷할거야라고 단정지었는데, 의외의 취향들을 많이 접하면서 기획자로서의 시야도 넓어졌지요.
취향수집클럽의 앞으로 계획은요?
취향수집클럽 시즌 2를 준비하고 있어요. 이번 모임의 부제는 <계절밤 북스테이 : 책과 술>입니다. 작년의 모임에서는 책, 영상, SNS 등 다방면의 콘텐츠를 다루었다면, 올해에는 ‘책’에 집중하려 해요. 집에 책이 너무 많아 이를 활용해 ‘책을 통해 나만의 취향 찾기’란 주제로 모임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