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작업실
안희연, 열과

아리골드
2024.10.24 11:25
조회수 11
안희연 시인의 에세이 '단어의 집' 내용 중에 이 시의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
시인이 자신의 낭독회에 참석한 분들과 서로 시를 낭독하고,
그 시를 선택한 이유를 공유했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이 시를 고른 분의 사연이 유독 오래 남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의 순간마다 이 문장에 기대었다고
.
자책의 순간마다 기댈 곳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두는 것이 좋겠죠
저에게도 과연 그런것이 있나 한참을 멀뚱히 떠올려 보다가
결국엔 생각이 나지 않아
일단은 저도 이 문장에 따라 기대어 보기로 했습니다
.
.
열과 (裂果)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렵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안희연 「열과」,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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