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작업실
[수필] 파슬리샐러드

고원의 밤
2024.05.17 00:47
조회수 31
파슬리가 좋다. 향도 좋고, 맛도 이쯤하면 달다. 이 멋진 허브를 장식용 가니시로만 이용한다는 것은 이를 재배했던 농부가 뒤로 자빠질 일이다. 40% 할인 딱지가 붙은 파슬리, 누긋하니 익은 토마토, 썩기 직전의 양파, 겉이 마른 오이, .... 먹다 남은 칠레산 수입 청포도. 냉장고 채소칸을 탁탁 털어낸다. 재료들의 면면은 변변찮지만 잘 다듬어 숭덩숭덩 썰어놓으니 모양새가 제법이다. 원 목적을 잃은 레몬 한 알과 프랑스에서 함께 돌아온 허브 화이트 비네거를 흩뿌려 석석 섞어준다. 시고 달구나. 짠 맛이 좀 부족한 걸. 수년째 찬장 한켠에 자리하며 돌덩이로 회귀하고 있던 히말라야 암염을 세게 흔든다. 제 떠나온 모습으로 돌아가던 돌덩이가 인위적 풍화를 거쳐 가루로 화하는 동안, 말랐던 전완근과 삼두박근도 0.0003mg정도 자란다. 맛을 보니 알맞다. 찢어진 골판지 상자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반찬통 하나를 끌어 빼낸다. 반찬통에는 흠 하나 없는 새하얀 유리 위에 작은 초록 새싹들이 점점이 그려져있고 이음새를 막아주는 고무밸브가 든든하다. 일이 뜻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새신부가 새신랑을 위해 갖은 요리를 담아냈을 터다. 좌절된 결혼, 빛바랜 설렘이 물끄러미 눈을 맞춘다. 다 만든 샐러드를 옮겨 담는다. 반찬통에 기스가 하나 둘 생기면, 생활의 냄새가 옛 기억을 흐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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