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라이프집에세이
#라이프집에세이는 개성적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크리에이터의 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면, 라이프집 에세이에서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

📝 writer. 김해서(@unanswered.letters)
작가이자 프리랜스 에디터입니다. 산문집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세미콜론)를 썼고, 인터뷰, 에세이, 시, 제품/콘텐츠 설명글 등 많은 장르의 글을 씁니다. 플랫폼 ‘밑미 meet me’에서 [하루 한쪽 외면일기]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달에 한 번 온라인으로 [주말 아침 시 낭독] 모임을 열고 있습니다.
'물 많이 마시기', '일찍 잠들기' 같은, 무심히 곱씹어야만 실감할 수 있는 작은 성공을 원합니다. 세상에 아무 말 얹지 않고도 좋은 하루를 보내는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김해서
서재에 앉아 생각한다.
시인이 되기 이전에 '시적인 삶'부터 살아보고 싶다.
오랜 지망인의 시간을 견디며
외롭고 궁핍하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으나 이제 인정한다.
시만이 줄 수 있는 위안.
등단과 상관없이, 시는 내게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아주 생생한.
나는 오래 전부터 시 속에 있었고,
이미 시로 위안을 받은 사람인 것이다.
⊹
서재, 詩가 자라는 나만의 숲
내게 가을은 없는 계절이나 다름없다. 짧아서가 아니다. 매해 11월 말에서 12월 초는 각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마감으로 채워지고, 이 시기의 나는 여느 활엽수 못지 않게 낙엽 버리듯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낸다. 일과 사랑에 쏟는 에너지를 '시'로 수렴시키려 한다. '쓰는 사람'이라는 가장 오래된 정체성만을 마주하며 삶의 부피를 부러 줄이기. 뾰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응모작과 시원섭섭한 이별을 하고 나서야 계절을 실감하는 것 같다. 우체국 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행인들의 옷차림을 통해 연말임을 알고, 나는 매번 가을 동안 실종되었던 사람처럼 얼떨떨한 감각으로 일상에 복귀한다.
오랫동안 문학 지망인이었다. 대학 졸업 후 프리랜스 글 노동자로 지내면서 여전히 내 자리를 잡는 데 허둥거리고 있고, 이외에도 책임져야 할 것에 짓눌리고 있으나 '시'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한 해 정도는 넘길 법도 하건만, 서늘한 북서풍이 내려오면 손끝에서 알러지마냥 피어오르는 간지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시에 저당 잡힌 사람이다.
대학 기숙사와 쪽방, 하숙집, 장례식장 바로 근처의 작은 원룸 등을 전전했던 시절을 거쳐, 허름하긴 해도 방이 세 칸이나 되는 빌라로 이사를 왔을 때 뛸듯이 기뻤다. 드디어 내가 이고지고 살았던 많은 책들을 위한 서재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각종 시집과 소설책, 산문집 등은 내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지만 보물이었다. 이것들을 정리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문학을 흠모한 열렬한 기억을 지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모든 사랑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지망인의 삶은 어떤 짝사랑 서사와 견주어도 손색 없을 것이다. 이삿짐을 옮기고 가장 먼저 구매한 것은 냉장고도, 가스레인지도 아닌 책장이었다.


©김해서
책장은 본래 세로형으로 높게 세워 쓰는 제품이었지만, 가로로 눕혀 사용하고 있다. 그래야 책장 위를 허리 높이의 선반처럼 사용해 책을 더 얹을 수 있으니. 내 맘과는 달리 여기저기서 들어온 각종 선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밀려난 책들은 바닥과 테이블 위를 나뒹구는 신세다. 나는 여러 개의 책탑이 쌓인 서재를 보며 고민에 빠진다. 변변찮은 벌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은데, 사는 동안 더 큰 서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서재도 사랑스럽다.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어지럽게 책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나는 순식간에 창작욕에 휩싸일 수 있다. 이 서재는 왕성한 질투와 동경의 숲. 애정하는 시집과 멋진 문장들에 허우적거리며 미등단자로서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하지만, 쓴맛과는 별개로 향기롭다. 늘 깨닫는다. '맞아, 문장의 아름다움과 활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특별한 정념에 매혹되어 내가 시를 시작했지. 이걸 어떻게 외면해.' 그렇게 남의 글을 보고 나면, 저절로 나의 시도 시작된다. 마우스 커서가 깜빡이는 문서 창, 온갖 문구가 난무하는 A4 용지 그리고 만년필. 나는 디지털 화면과 종이 위를 펄쩍거리며, 주눅 들고 서글픈 마음도 잊은 채 그저 쓴다.
최근 지독한 감기에 걸린 적 있는데, 열이 펄펄 끓는데도 통각을 상실한 사람마냥 썼다.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 몰래 스탠드를 이불 안에 끌고 들어가 새벽까지 책을 읽던 어느 날이. 그 쿰쿰하고 뜨거운, 유혹적인 호흡곤란. 그땐 그곳이 내 서재였다. 나는 당시의 어린아이가 된 것마냥 그저 좋아 히죽거렸다. 몸살로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데 펜을 들어 머릿속을 스친 요상한 문장을 기어코 적어 내려갔다. 물수건이 이마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메모장을 상장처럼 펼쳐 보며 행복해 했다. '와, 정말 쩌는 글이야!'
다음 날, 열이 내린 아침에 기대에 찬 심정으로 시를 다시 읽는데 웬걸.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약 기운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지 그날 적은 문장은 어디에도 써먹지도 못할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만족감에 킬킬 웃으며 몸을 떨었다. 내가 형편 없어서 다행이야. 그러니 아름다운 걸 탐했지. 이 꼴이 난 게, 어쩌면 내겐 좋은 일인지도 몰라.
서재에 앉아 생각한다. 시인이 되기 이전에 '시적인 삶'부터 살아보고 싶다. 오랜 지망인의 시간을 견디며 외롭고 궁핍하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으나 이제 인정한다. 시만이 줄 수 있는 위안. 등단과 상관없이, 시는 내게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아주 생생한. 나는 오래 전부터 시 속에 있었고, 이미 시로 위안을 받은 사람인 것이다.
가을. 올테면 오고 잘 가라지. 올해도 방에 틀어박혀 쓴다. 어디로 불시착할지 모르지만 훨훨 날아가기로. 늘 다시 종이 위에서 출발하기로. 서재 안을 헤매는 내 숨결의 소리는 뚜벅뚜벅. 어차피 이 숲을 벗어날 길도, 마음도 없다.


©김해서
Credit
Writer & Editor Haeseo KimDesign Jaehyung Park
Production SIDE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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