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라이프집에세이
#라이프집에세이는 개성적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크리에이터의 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면, 라이프집 에세이에서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

📝 writer. 김미리(@suful415, @merrymiry)
12년간 다양한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MD로 일하다, 최근 퇴사했습니다. 현재는 글 쓰는 작가이자 프리랜서 브랜드 인큐베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에세이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를 썼고, 온라인으로 『퇴사원 주간보고』와 『계절편지』를 연재 중입니다.


© 김미리
주방 창가에 서서 빛의 기운이 작게 남은 텃밭을 내다본다.
그러다 뒤늦게 안다.
오늘 텃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도 함께 심겼다는 것을.
이제는 기다리는 일, 지켜보는 일, 땅의 힘을 믿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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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텃밭에 심은 것
아침부터 이웃집 텃밭을 힐긋거린다. 정갈한 이랑 위에 줄 맞춰 심긴 배추 모종들이 보인다. 어르신은 벌써 다 심으셨네, 나는 아직 밭도 못 갈았는데…….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주방으로 돌아와 차를 우린다. 그러면서도 어르신의 텃밭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결국 마음이 급해져 마시던 차를 대충 털어 넣고, 서둘러 마당으로 나선다.
순찰하듯 마당을 둘러보다 꽃송이를 떨군 배롱나무 앞에서 멈춰 선다. 여름 내내 분홍빛으로 화단을 지키던 배롱나무꽃. 그 꽃이 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여름이 물러나고 있다는 뜻,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앞마당을 비잉 돌아 뒷마당 텃밭으로 들어선다. 감자와 옥수수를 수확하고 비워두었던 텃밭이 어느새 자란 잡초로 무성하다. “아니, 지난 주말에 다 뽑았는데 언제 또 이렇게 난 거야. 이번 주도 풀 뽑다 끝나겠네.” 입은 투덜거려도, 손은 어느새 잡초를 뽑고 있다.

© 김미리
주말이 되면 이곳에 산다. 서울에서 2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자리한 집. 앞마당엔 화단이, 뒷마당엔 텃밭이 있는 작은 한옥집. 과거엔 귀신의 집, 흉가, 폐가로 불렸으나 지금은 다정히 수풀집이라 불리는 나의 집.
주말마다 이 집에서 N잡러를 자처하며 살고 있다. 성실하지만 손끝이 야물지는 않은 주택관리사, 삼시 세끼를 책임지는 요리사, 꽃보다 잡초가 많은 화단의 정원사, 작은 텃밭을 돌보는 농부, 마당 고양이 급식소 운영자, 동네 개들의 산책 도우미, 앞집 할머니의 브런치 메이트. 이 직업들은 계절 따라 성수기와 비수기를 겪는다. 오늘부터 성수기에 접어든 직업은 농부다. 가을 농사를 시작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가을볕 아래 텃밭에서 서둘러 잡초를 뽑는다. 돌을 고르고, 괭이질한다. 밭을 오가며 반나절쯤 보냈을까. 일곱 개의 이랑이 두두룩히 만들어졌다. 그러면 나는 차에 시동을 건다. 엉덩이와 소매엔 흙을 잔뜩 묻힌 채,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 목적지는 읍내에 있는 종묘사다. 작물의 씨앗이나 모종, 묘목 같은 걸 파는 곳으로 시골살이를 시작한 후 계절마다 들르는 장소 중 하나다. 종묘사에서는 배추 모종 두 줄과 무씨를 산다. 큰 바구니에 하나가 오천 원이라는 쪽파 종구는 천 원어치만 살 수 있는지 조심스레 여쭙는다. 사장님은 흙 묻은 내 옷차림을 스윽 보시더니 시원하게 외치신다. “오케이!” 덕분에 올해 김장을 책임질 배추, 무, 쪽파 삼총사가 무사히 결성되었다.
그들을 조수석에 안전히 모신 뒤엔 지체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만들어 둔 두둑에 배추 모종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심는다. 무씨는 한 구멍에 서너 개씩 넣은 후 포슬포슬 흙을 덮는다. 사이사이 매서운 가을 모기에게 헌혈하는 것도, 새참을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는다. 쪽파 종구는 겉껍질과 수염뿌리를 정리하고 적당한 크기로 쪼갠다. 그리고 윗부분을 잘라 작은 생채기를 낸 뒤 손가락 두 마디 깊이로 심는다.


© 김미리
4년 차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초보 농부다. 그래서 이웃 어르신이 심으면 심고, 거두면 거두는 눈치 농사를 지향한다. 농사 스승인 앞집 할머니께 부지런히 농사 특강도 듣는다. 배춧속이 차오르면 배춧잎을 들춰 속을 파먹는 벌레를 잡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더 배울 필요 없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있다.
여린 배춧잎이 점차 커다래지고 속을 채워나가는 것, 쌀알만 한 무 씨앗이 지면 위로 푸르스름하고 단단한 이마를 내미는 것, 쪽파 종구가 작은 생채기에서 푸른 줄기를 통통하게 올리는 것. 그것은 농부 홀로 해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사로운 가을의 햇빛, 선선한 바람, 새벽이슬, 차분히 겨울로 향하는 추위가 함께 해야 한다. 농부는 언제나 계절과 손발을 맞추며 일한다. 그러니 마주한 일기(日氣)에 감사하고 다가올 일기(日氣)를 차근히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텃밭에 물을 흠뻑 주는 것으로 오늘의 업무를 마무리한다. 어느새 어둑해진 마당을 뒤로하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부터 챙겨 먹고 대청마루에 앉아 별구경을 해야지 다짐하며. 주방 창가에 서서 빛의 기운이 작게 남은 텃밭을 내다본다. 그러다 뒤늦게 안다. 오늘 텃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도 함께 심겼다는 것을. 이제는 기다리는 일, 지켜보는 일, 땅의 힘을 믿는 일만 남았다. 밤이 깊어지고 가을도 깊어진다.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원한다. 그렇게 넓어진 마음 밭에 소박한 행복의 씨앗을 심고 돌보는 날들이 계속될 수 있기를.
Credit
Editor Haeseo KimDesign Jaehyung Park
Production SIDE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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