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로잉을 둘러싼 연씨의 다영한 활동 중 어떤 면에 가장 흥미나 매력을 느끼세요?
몰입에서 오는 쾌감이 큰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형상, 모습을 시각화해서 박제하는 느낌이나 뭔가를 해소시켜 주는 느낌도 좋고요. 그런 면에서는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이 질문을 읽었을 때 하나의 답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더라고요. 저의 드로잉을 둘러싼 활동에 포함되는 것들이라면 우선 생각들을 해체시키는 부분, 그리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정리하는 부분, 묘사하면서 몰입하는 부분, 마지막으로 미세한 정리하면서 완성에 가까운 모습을 보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는데, 이 모든 과정들을 다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드로잉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나 시기가 있었나요?
딱히 계기라는 게 있었나 싶은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있긴 있더라고요.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독일에서 1년 동안 교환 학생으로 지내면서 일종의 문화 충격이란 걸 겪었어요. 그리고나서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역 문화충격을 느꼈고요. 제 정체성에 대한 혼란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서울에 있었어요. 근데 서울이라고 나을 것도 없었죠. 이미 외국 나가서 10년 이상을 보냈기 때문에 서울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지내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고, 여러가지가 다 겹쳐서 힘들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카페 나가서 하루 6-7시간씩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었어서 너무 많은 생각을 잠재우는 방법 중에 하나로요. 생각을 비우고 싶었기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보다는 드로잉을 하는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세밀화를 그리게 됐나보군요.
그때부터 되게 촘촘한 그림을 그렸는데 뭔가 하나에 집중하고자 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 약간 명상 같은 개념으로 그렸던 것 같아요. 선이나 면이 작으면 작을수록 그 안으로 빠져들 수 있잖아요. 컬러링이나 뭐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이런 드로잉을 하게 됐었어요.
그 당시 오래도록 그렸던 세밀화들은 어떤 것이었어요?
초기에 그린 것 중에 제가 좋아하는 게 몇 개 있는데, 이 작품 같은 경우에는 생명의 진화과정과 시간의 개념의 뫼비우스 띠 형태로 표현한 거예요. 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을 묘사한 거예요. 역사는 반복한다고 하고 하잖아요. 근데 그렇다고 계속 같은 점을 찍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떤 도형 위에 시간을 표현할까 생각하다가 나선형을 떠올렸어요. 패턴은 같지만 계속 다른 점을 찍는 거죠. 제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그리는 작업들이나 그런 뫼비우스 띠 같은 개념도 재미있게 다가왔고요. 그래서 그것들을 다 섞어서 그린 거예요.
생명의 진화과정과 시간의 개념을 뫼비우스 띠 형태로 표현했군요.
네 뫼비우스의 띠라서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는 형태인거고 나선형 함수 공식을 찾아보고 중간에 적어 넣었어요. 그래서 이쪽부터는 무척추 동물이랑 양서류, 포유류부터 해서 사람 이전에 원숭이, 그 다음에 이제 사람 다리가 나오면서 우리 인간이 나오는 흐름이에요. 저는 작업할 때 바로 뭔가를 보고 묘사하기보다는 좀 생각을 구조랑 큰 덩어리를 좀 잡아놓고 그리는 편이긴 해요. 이것도 연필로 큰 틀을 잡아놓고 시작했던 기억이 있네요.
세밀화라는 방식이나 주제적인 면에서나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이는데 이런 드로잉을 그리게 된 배경이 있을까요?
글쎄요. 그냥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해서 그게 그림으로는 이렇게 풀리는 것 같고, 다른 브랜딩 작업을 하거나 컨설팅 회사에서 브랜드 전략 일을 하거나 그럴 때도 뭔가 표출은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솔직히 제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루 중 드로잉을 하는 시간이 있나요?
드로잉에 대한 루틴은 없고 루틴에 포함된 드로잉만 있어요. 저는 오전 시간을 좋아해요. 회사 다닐 때도 점심 먹기 전에 효율이 가장 잘 올랐고 점심 먹고 나면 그냥 빨리 하루가 끝났으면 좋겠고 집중도 잘 안 되더라고요. 올해 1월 정도부터 정립된 루틴을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월화수목 정도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작업을 해요. 한 4시간은 공복 유지하며 일에 집중한 다음에 가볍게 아침 먹고 운동갔다와서 샤워하고 밥을 해먹으면 오후 서너시가 되죠. 저녁 7-8시가 되면 잠을 자요. 드로잉은 하루 일정 사이에 해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써놓고 오늘 하루에 몇 시간이 있는지, 해야 하는 일이 몇 개인지 시간 분배를 한 다음에 중간중간 하죠.
드로잉을 흔히 ‘외주’라고 부르는 일로서 할 때랑 생각을 정리하거나 상상력을 펼치기 위해 할 때랑 어떻게 다른가요?
업으로 하는 작업은 상대방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든지 제가 리서치를 더욱 하는 편이죠. 배경이나 취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고 싶은 말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앞단의 작업이 더 있다고 해야하나? 왜냐면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을 시키고, 공감도 불러일으켜야 해서 인 것 같아요.개인적으로 그릴 때는 조금 더 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나 화두들을 제가 스스로 펼쳐서 해체시켜서 정리하는 편이고요.
외주 작업이 일종의 제약으로 다가오지는 않나요?
물론 외주로 일을 할 때는 제가 맞춰야 되는 부분들이 있지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게 있다보니 사실 제가 개인작업만 했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시도들을 하기도 해요. 이를 테면 얼마 전에 의뢰받은 큰 그림 하나가 있는데 책가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림이거든요. 사실 저는 색깔 쓰는 것도 두려운 건지 귀찮은 건지 잘 안 쓰곤 하는데(웃음) 그렇게 타인이 부탁해오는 게 있으니까 오히려 제가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클라이언트들의 요구를 불편해하지 않아요. 개인 작업만 한다면 어느 부분에서는 답답함을 느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클라이언트 일도 개인 작업도 둘다 재미있어해요. 계속해서 병행하고 싶어요.
작업 환경에 대해 말해보죠. 어떤 도구를 쓰세요? 도구에 따라 드로잉의 즐거움이나 효율에서도 차이를 느끼나요?
컴퓨터로 하는 디지털 작업하고 손으로 하는 작업 둘 다 하는데 요즘 다시 손으로 하는 거 조금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세밀화 초반에 할 때 많이 썼던 펜은 마이크론 펜 0.05 짜리 가장 얇은 거 그거 많이 썼었고 최근에는 이것저것 써요. 네임팬, 포스카펜, 아크릴 마카. 그리고 요즘은 좀 색깔 작업도 같이 해보려고 하고 있어서 유성 마카도 쓰고 있어요. 드로잉은 개인적으로 손으로 할 때 더 즐겁긴 해요. 종이에 잉크를 묻혀가면서 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컴퓨터를 중심으로 디귿자로 작업 공간이 있어서 각 책상에서 주로 하는 일이 조금씩 다르긴 해요. 가장 긴면의 테이블에서는 곧 들어갈 레지던시 관련 작업을 하고, 주방이랑 가까운 면 책상에서는 다양한 개인 작업을 하고요. 그냥 이 네모 안에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어요.
드로잉을 잘하기 위해서 내가 익힌 관찰방식이라던가 습관이 된 것이 있는 지도 궁금해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순간순간 느끼는 부분이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어요. 다시 말해, 드로잉은 제가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영역이 아니에요. 관찰 방식은 없는 건지 제가 인지하지 못한 건지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굳이 꼽자면 실눈을 뜨는 정도?
실눈 뜨기라고요? (웃음)
되게 사소한 거이긴 한데, 요즘 사물을 좀 보면서 그리다 보니까 실눈을 뜨면 명암이 잘 보이더라고요. 주로 자세히 묘사할 때 저는 명암을 갖고 노는 걸 좋아해서 그럴 때 실눈을 뜨고! 사물을 바라봅니다.
아무 일정도 없을 때 혹은 그림에 영감을 받고 싶을 때 가는 장소들도 궁금합니다.
사실 ‘오늘 혼자 논다’ 하고 밖에 나가면 동묘를 가거나 집에서 혼자 혹은 친구들이랑 와인 마시면서 요리를 해요. 창경궁도 계절마다 방문하고요. 중고보세의류 판매하는 ‘빈프라임’ 구경도 좋아하고요. 그리고 영감을 위해서라면, 더 자주 가야하는데 싶긴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나 청담동 꼬르소꼬소모가서 구경도 하고 책도 보고 오고요. 경리단길 쪽 서점 ‘그래픽’도 새로운 작업 시작하기 전에 환기를 위해서 가는 편이에요. 최근 오컬트, 종교, 초자연, 미신 등등 신비주의 관련된 책을 하나 샀는데, 옛날부터 사람들이 과학과 철학을 연결시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주얼로 표현한 게 매우 흥미로워서 요즘 잘 보고 있어요.
경계가 없고 자유분방한 연씨의 느낌과 예스럽고 세밀한 그림체 모두 동묘랑 묘하게 어울립니다. 동묘에서 느끼는 영감을 조금 더 설명해주신다면?
우선 거기는 사람들이 저를 좀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고요. 이를 테면 신사동 가로수길에 갔을 때 에너지를 뺏기는 느낌이라면 동묘가면 좀 채워지는 것 같거든요. 아저씨들, 할머니들 관찰하고 얘기 듣고 하는 게. 그리고 말그대로 야외 만물상이잖아요. 세상 유일무이한 보물들을 구경하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지요. 이 모든 게 어디서 온 걸까, 누군가가 몇십 년 쓰던 것일텐데 싶으면서 계속 구경하게 되죠. 청담 꼬르소꼬모 가서 ‘요즘 이런 것들이 있구나’하고 좀 보고나서, 같은 날 동묘까지 찍고 오면 뭔가 싹 밸런스 한번 맞추고 집에 들어오는 뿌듯한 느낌?! 같은 것도 있어요(웃음)
하시는 일이 되게 다양한데 뭐가 제일 신나고 재밌어요?
해방촌에서 2년 정도 운영하던 비건 사찰음식점 ‘소식’ 문 닫고 주방 도구랑 식재료들이 남아서 하게 된게 요리인데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거의 외식을 안 해요. 그래서 친구들도 항상 여기 제 집이자 작업실로 초대해서 같이 와인 마시고 밥 해먹는 데, 이게 저의 가장 큰 취미라고 할 수도 있죠. 취미를 드로잉으로만 한정지어서 생각하진 않아요.
그럼 연씨의 취미는 무엇이라 소개할 수 있을까요?
취미는 내가 해야만 하는 또다른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게되고 즐거운 일이어야 해요. 요리든, 드로잉이든, 요가든, 제가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이라고 봐요. 제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이 건강했으면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몇십 년 전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업이 줄겠죠? 그러면 자연히 취미 생활에 시간을 더 많이 쓰게 될텐데, 그러려면 건강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