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층으로 난 집 구조가 정말 특이하네요. 외국의 에어비앤비 같기도 하고요.
여기 빌라에 딱 4가구가 사는데 모두 복층 구조에요. 실제로 건물 주인 분이 에어비앤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지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관리가 쉽지 않기도 해서 세입자를 받았다고 해요. 원래 이 집에는 제 지인이 살았는데, 마침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제가 들어오게 됐고요.
주변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작업실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인가요?
산이 근처에 있고 산책하기 좋은 길이 항상 주변에 있었던 것 같아요. 어디에 살던 산책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오랜 기간 뉴욕에 머무셨어요. 그 때도 작가님만의 산책 코스가 있었겠군요.
뉴욕에서 7년 정도 살며 학교를 다니고 직장 생활을 했는데, 항상 주변에 공원이 있었어요. 어퍼 이스트 끝자락에 자리한 집 근처에도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는데, 거의 주민들만 찾는 곳이었죠. 동네 할머니들이 자원봉사로 가드닝을 하고, 여름에는 사람들이 태닝을 하러 나오는 다정한 모습이 참 좋았어요.
서촌에서도 벌써 7년째 살고 계세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드나요?
일단 제가 인왕산을 좋아해요. 아침에 딱 눈을 뜨고 인왕산 주변을 산책하는 게 너무 좋거든요. 서촌은 동네 분들도 점잖으시고, 좋아하는 갤러리도 가까이에 있고요. 작업을 하다가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작업실과 주거 공간을 함께 쓰는 게 익숙한가요?
처음 작업실을 구했을 때 집은 다른 동네에 떨어져 있었어요. 그 작업실도 이렇게 산이 보였는데, 집을 합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소문 끝에 복층집을 하나 구했어요. 집과 작업실을 합치니 마음이 편하고 좋더라고요. 언제든 내킬 때 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성향상 이런 구조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복층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뭔가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 같기도 해요.
작업실로 올라오면 작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긴 해요. 그런데 이전 집은 복층이 아니었거든요. 집 안에서도 작업을 하는 걸 일상처럼 편하게 느끼는 편이에요. 맨발로 편한 옷차림이어야 더 작업이 잘 되는 것 같아요.
애착이 가는 가구나 소품이 있다면요?
뉴욕의 엔틱 숍에서 산 책장이랑 스툴이요. 한국으로 들어올 때 배에 실어서 갖고 왔어요. 아래층에 있는 화장대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자전거도 다 가지고 온 물건들이네요. 제가 물건을 한 번 사면 버리지 못해서 짐이 좀 많아요. 안 입는 옷도 다 이고 지고 다니니까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이 늘어났죠.
작업실에 머물 때 특별히 좋아하는 시간대가 있나요?
오후 2-3시쯤 볕이 좋을 때 작업을 가장 많이 해요. 물론 새벽 밤 늦게까지 할 때도 있지만요.
보통 시간을 정해 두고 작업을 하는 스타일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하루 종일 할 때도 있고, 쉴 때는 그냥 쉬죠. 그럼에도 자기 전에 간단한 드로잉을 하나씩 해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아무런 작업을 하지 않은 날에는 뭐라도 하나 그려야 죄책감도 덜 들고 하니까요. 두성 페이퍼에서 만든 샘플북을 드로잉 북으로 쓰는데, 종이의 질감이 저마다 달라서 좋아요. 표지는 제 그림으로 만들어 봤어요.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일단 공기를 확인하고 좋다 싶으면 무조건 나가요. 일단 동네를 한 바퀴 쓱 돌고 와서 하루를 시작하는 거죠. 약속이 있으면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작업을 해요.
뉴욕에서는 디자이너로 활동하셨어요. 브랜드 디자이너에서 순수 미술에 가까운 일러스트레이터로 삶의 궤적이 바뀐 셈인데, 그런 결정을 내린 과정이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어요. 둘째 언니가 미술을 전공을 했는데 동양화를 전공해서 유독 재미가 없어 보였나봐요. 그래서 저는 그냥 디자인을 전공했고,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을 하게 됐죠. 그런데 어느 순간 번아웃이 왔어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디자인은 결국 제 것이 아니잖아요. 미련 없이 일을 그만두고 판화 클래스를 신청해 들었어요. 그러면서 개인 작업을 조금씩 시작해봤는데, 우연히 <엘르> 매거진에서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전속으로 일을 맡게 됐죠.
일러스트레이터와 작가. 한국에서는 이를 구분짓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개인 작업을 하고 전시도 열면서 뭔가 경계를 두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려왔어요. 사람들이 제게 일러스트레이터인지 페인터인지 물어보는데 저는 그런 경계를 구분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런 구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거든요. 다만 제가 한국에서 순수 미술을 하지 않은 건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랬다면 아마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실제 작업을 할 때도 그런 경계를 두지 않는 편인가요?
잡지 일러스트 일을 할 때는 글을 그림으로 옮기는 게 일러스트의 역할이니까 초기에는 글에 맞춰 작업을 했죠. 그러다 최근에 한 잡지사와 순전히 일러스트에 초점을 맞춘 화보 기사를 하나 만들었어요. 글을 단순히 보조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그림으로 접근한 기사인 거죠. 예전부터 잡지 표지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꼭 표지까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그림 중심의 화보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 작업을 할 때만큼은 일러스트와 페인팅의 경계가 사라진 기분도 들었고요.
인물 그림의 경우 정면을 응시하는 앵글이 작가님의 스타일로 자리 잡은 듯해요. 언뜻 무심해 보이는 표정도요.
사실 처음에 그림을 그릴 때는 회사 동료나 친구들 얼굴을 많이 그렸어요. 동네 공원에서 관찰한 식물도 많이 그렸고요. 자연스럽게 주변에 항상 보이는 대상을 그렸던 거죠. 인물은 저도 모르게 무표정한 얼굴을 그리게 됐는데, 저는 표정 없는 얼굴이 그 사람의 본 모습 같다고 생각해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이 뭔가 연약해 보이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뉴욕에 있을 때 마리아 칼만(Maria Kalman)을 좋아했어요. 그림체가 사랑스러운데 특히 수작업으로 만든 책 자체가 아름다워요. 저도 첫 책을 낼 때 그의 책처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죠. 그리고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처럼 평생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림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작업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전시를 할 때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궁리해보곤 해요. 그래서 세라믹이나 유리 공예 같은 것을 시도해보고 있죠.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나요?
동네의 더레퍼런스라는 사진 전문 서점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한 번은 제가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렀는데, 동네 분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림을 보고 계시더라고요. 반려견이나 아이들 출입도 가능하고 자연스럽게 동네 주민들이 전시를 즐기는 모습이 정겹고 좋았어요.
작업실에서 드로잉 모임을 해볼 생각은 없나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노년에 자기 아파트에서 주말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 그리는 모임을 했는데, 정말 멋져 보이더라고요. 제 작업실은 사적인 공간이라 일반인들을 초대할 순 없지만, 가까운 지인들이 놀러오면 종종 함께 그림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누군가에게 치유의 힘이 되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