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요.
2022 한국 시리즈에 LG 트윈스가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무척 속상하고 힘들었죠. 한 달을 착잡한 마음으로 견뎠어요. 이젠 괜찮습니다. 내년에 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야죠.
사시는 곳이 대구이니, 이곳이 연고지인 삼성 라이온즈 팬이어야 하지 않나요? LG 트윈스는 서울에 홈구장이 있는데요.
한동안은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했습니다만, 제가 경쟁사에 다닙니다.(웃음) 그래서 LG 트윈스로 팬심을 이적했어요. 또 KBO 팬으로서는 팀을 나눈다는 게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로 응원하는 팀은 있지만 전 그냥 야구를 사랑하는 거니까요.
야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82년 MBC 청룡이 창단할 때부터였어요. 저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아버지 따라서 야구장에 갈 때면 참 좋았어요. 어릴 때는 유니폼 입고 장비도 갖추고 운동하는 게 참 멋져 보였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야구 선수들 얼굴이 새겨진 딱지를 팔았던 것도 기억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듯이 수집하고 또 교환도 했던 추억이 있죠. 야구는 제 오래된 친구인 셈이에요.
오랜 야구팬임을 증명하듯 전실 복도에 야구 유니폼이 담긴 액자가 전시되어 있던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수집품인가요?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수집품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승엽 선수가 은퇴 경기를 하던 날 실착한 장갑과 당시 한정 출시한 기념 야구 유니폼입니다. 2017년 당시 이승엽 선수는 대구에서 열린 넥센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렸어요. 그 후 관객석을 향해 던진 장갑 2개를 다 제가 잡았습니다. 저에겐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찬 날이었기에 그 일을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그의 선물을 액자로 제작했어요.
정말 놀라운 인연이네요. 그때 받은 공은 어디에 있나요?
저를 따라오세요. 2개의 사인 볼을 포함한 3000여 점의 수집품을 전시한 저의 작은 뮤지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런 방은 처음 봐요. 여기에 3000여 점의 수집품이 있다고요?
사인 볼은 2500개쯤 될 겁니다. 유니폼과 모자가 수십 개, 선수 지급용 배트가 20여 개, 야구 관련 기념구가 또 수십 개입니다. 이 중엔 제가 사인받기 위해 직접 제작한 야구공도 100여 점 있어요.
이 많은 걸 다 어떻게 3평(약 10m2) 남짓한 방에 보관하나요?
우선 좌측의 사인 볼 장식장은 가로 36개, 세로 25개의 공을 수납할 수 있도록 직접 설계했습니다. 1개의 칸에 3~4겹씩 약 16개의 사인 볼이 들어가 있어요. 유니폼과 배트는 별도로 진열할 수 있도록 장식 공간을 만들었고요.
이걸 다 모으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본격적으로 사인 볼을 모으기 시작한 건 8년 전 부터예요. 한 해 평균 300개 정도 모은 셈이네요.
왜 사인 볼을 모으게 됐나요?
우연한 경험에서 시작됐죠. 2014년 6월 7일, 주말에 가족과 함께 대전 여행을 하며 야구장을 찾았다가 박석민 선수(당시 삼성 라이온즈 소속, 현 NC 다이노스 내야수)의 스리 런 홈런을 직관하게 됐습니다. 감동을 안고 호텔로 돌아오던 중 우연히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과 마주쳤어요. 저희 가족이 선수들과 같은 호텔에 묵었던 거죠. 그때 박석민 선수와 박한이 선수(현 삼성 라이온즈 코치)에게 사인을 받고 참 기뻤습니다. 야구 경기를 보러 다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선수들과 소통하는 즐거운 경험을 계속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늘 사인펜과 사인 볼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언젠가 만나게 될 야구 귀인을 기다립니다.
사인 볼을 2500여 개나 모았다면 사인을 받는 나름의 노하우도 있을 듯하네요.
물론이죠. 이것도 다 요령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수에게 야구공을 건네는 방법인데요. 야구공의 실밥과 실밥이 가장 가깝게 만나는 중간 부분을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선수들이 사인하기도 편리하거니와 사인 볼의 가치를 높여주는 위치예요. 공을 잘 쥐고 선수에게 스위트 스폿을 보여주며 사인을 요청해야 합니다. 선수들은 대개 이동 중에 팬을 만나기 때문에 정신없이 사인하는 경우가 많아요. 따라서 이런 걸 챙기는 게 바로 진정한 팬이라고 할 수 있죠. 두 번째는 사인펜의 브랜드입니다. 선이 가늘고 분명하게 나올수록 사인 볼에 쓰기 좋은 펜입니다. 국내에선 검은색 모나미 유성 매직을 가장 널리 사용해요. MLB의 경우는 ‘유니언 볼’이라고 하는 가는 파란 펜을 선호합니다.
컬렉팅하는 나름의 기준도 있나요?
저는 두 가지 원칙을 세우고 사인을 받습니다. 첫째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운 선수일 것, 둘째는 팬 서비스가 좋은 선수여야 합니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입니다. 박철순 선수가 한국 야구 최초 22연승을 하던 날, 이승엽 선수가 통산 최다 홈런 467개를 치던 날, 박용택 선수가 통산 최다 안타 2504개를 돌파하던 날의 사인 볼은 기록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팬 서비스가 좋은 선수는 그냥 마구 정이 갑니다. 잘되었으면 좋겠고 더 응원하게 돼요.

기억에 남는 팬 서비스를 해준 선수가 있나요?
2017년 오키나와 팬 투어에서 만난 힐만 감독(당시 SK 와이번스 감독, 현 메이저리그 내셔널 리그 마이애이 말린스 코치)과 박정배 코치(전 SK 와이번스 투수, 현 키움 히어로즈 코치)가 기억에 남아요. 힐만 감독 부임 후 최초로 사인을 요청했던 게 바로 접니다. 그 인연이 이어져 대구 원정을 올 때면 늘 저와 따로 인사를 나누었죠. 소주를 좋아하던 수수한 모습이며 팬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나누던 배려가 기억에 남아요. 박정배 코치는 서로 딸들이 동년배라 아이 키우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어요. SSG 랜더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는 박종훈 선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인 볼을 들고 있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펴주던 따뜻한 마음이 기억에 남아요.
가장 최근에 모은 사인 볼은 무엇인가요?
최근 5차전 끝내기 홈런을 친 SSG랜더스 김강민 선수의 사인 볼입니다. 야구인으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불혹에 활약하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 사인 볼을 건네면서 ‘이 맛에 야구를 보는구나’, ‘이 선수의 사인은 컬렉팅할 가치가 매우 크다’고 느꼈죠.
사인 볼은 경제적으로도 가치가 있나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 몇 개를 제외하곤 경제적 가치가 크지는 않아요. 야구팬들 사이에서 사인 볼 하나당 1만-2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인 볼을 모으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직접 만나기 힘든 선수에게 사인 볼을 받으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합니다. 하지만 컬렉터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죠. 수집욕을 불태울 아이템은 또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이 방에 들어오면 무슨 생각을 하나요?
수납 아이디어를 계속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정리하고 꾸밀 수 있을까?’ ‘이번에 새로 들여온 기념구는 어느 자리에 포석(布石)하는 것이 좋을까?’ 요즘은 수집품을 분류하고 정리할 재고 관리 프로그램으로 저만의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공을 넣은 유리 케이스에 QR코드를 붙이고 각각의 위치를 정해 준다면 좋겠죠.
직접 수집품 재고 관리 시스템까지 만들 예정이라니 열정이 정말 대단하네요.
제 본업이 MD입니다.(웃음) 재고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어요.
수집품을 보관하는 방은 어떻게 관리하나요?
야구공도 화학물질로 만든 물건이라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몸에 좋지 않은 게 확실하죠. 이런 게 수천 개 모여 있으니 환기가 정말 중요합니다. 공기청정기와 제습기로 자주 공기 질을 관리하고 수집품에 해가 되는 습도 지수인 50이 넘지 않도록 신경 씁니다.
요즘 가장 응원하는 선수는 누구인가요?
대구 경산시 리틀야구단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제 아들입니다.(웃음) 저랑 야구장도 다니고, 동네 야구를 하며 홈런을 치던 아들이 2015년 5월 드디어 선수 데뷔를 했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워요. 처음엔 사진 찍어주려고 주말마다 아이와 함께 경기장에 가다가 요즘엔 중계까지 시작했습니다.
일반인이 중계를 할 수 있나요?
처음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사진 장비와 캠코더, 노트북으로 중계를 하고 유튜브에 올렸어요. 경기 시작 전엔 장비를 세팅하고 경기가 끝난 후엔 자막 넣는 작업까지 하느라 바빴지요. 계속 하다 보니 중계 화면이 고르지 못한 게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에서 LTE 중계 장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을 찾아가 전문 장비를 구했습니다.
LTE 중계 장비라면 방송사에서 특파원들이 스튜디오와 현장을 연결할 때 쓰는 방송용 기기 아닌가요?
맞습니다. 개인이 이걸 구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더라고요.(웃음) 여기에 2대의 캠코더와 무선 연결 장비, 중계용 프로그램과 스포츠 전문 방송사에서 사용하는 자막 프로그램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록이 계속되다 보니까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나서 요즘은 중계와 장비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아요.
야구 사인 볼을 컬렉팅하는 취미가 점점 진화하는 셈이네요. 이런 취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단연 가족입니다. 가족이 없으면 컬렉팅의 의미도 없어요.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취미를 찾았고, 컬렉팅의 소중한 순간마다 옆에 늘 가족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팬 투어, 이승엽 선수의 은퇴 경기, 박철순 선수를 직접 초청했던 경산시 리틀야구단 동계 훈련 등등. 저 혼자만의 추억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어 더욱 뜻깊어요.
이 취미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
이 취미는 배려가 관건입니다. 팬과 팬 사이, 팬과 선수 사이의 존중이 필요해요. 너무 몰입해서 사생팬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지 마세요. 사인 볼을 받는 건 야구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해 온 소중한 문화라는 점을 기억하고, 선수가 바빠서 사인해 주지 못해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또 저처럼 여러 선수에게 받는 것보다는 특정 선수나 구단을 응원하며 자신만의 컬렉팅 색깔을 만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구 시즌을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 본인만의 방법을 알려주세요.
우선 목욕재개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TV 앞에 앉습니다. 태블릿과 휴대폰에 각각 다른 경기를 띄워두고 2~3개 경기의 상황을 모두 살피며 보세요. 정신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아주 재미있어요. 여러 경기를 섭렵하며 시즌의 흐름을 읽는 게 제가 야구 시즌을 즐기는 방법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야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직관입니다. 선수들을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익사이팅존에 꼭 앉아보세요. 구장마다 위치가 다르니 예매 전 검색은 필수입니다.
‘찐팬’으로서 KBO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학령인구는 점점 줄고 있는 시대입니다. 야구하는 아이들이 많이 줄고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프로야구 리그가 있는 나라는 고작 10개국에 그치고요.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듭니다. 복잡한 장비와 인프라의 장벽을 낮추고 저변을 확대해 더 많은 미래의 프로 선수를 기르는 데 힘써 주었으면 좋겠어요. 한 방에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스포츠가 어디 흔합니까? 저는 이토록 매력적인 야구를 오래오래 보고 싶어요.
이 컬렉팅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점점 더 분명해지는 목표가 있습니다. 이제까진 프로 선수의 사인을 컬렉팅했지만 이제는 주니어와 청년 야구 선수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팬이 되고 싶어요. 선수의 성장과 함께하고 교감하고, 동시대를 살며 은퇴까지 지켜봐 주는 그런 사람이요. 컬렉팅을 넘어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자 사랑을 줄 수 있는 야구팬이 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