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지은 한옥이 무척 근사해요.
정릉에서 살다가 서촌의 아주 낡은 한옥집을 고쳐 이사했어요. 이곳에서는 주로 공부를 하고 거실에서 강의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구성했어요.
한옥에는 당호를 붙이잖아요. 이곳에도 당호가 있나요?
유예소. ‘유경희 예술 처방 연구소’를 줄인 이름이에요. 또 ‘유예된 공간’이라는 중의적인 뜻도 있는데 일종의 연옥 같은 곳이랄까요. 지상에서의 시간을 지혜롭게 보내기 위해 이 공간을 잘 활용하자는 의미예요.
이 집을 구성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어디인가요?
거실의 긴 테이블에서 프라이빗 강연을 하는데, 한쪽 벽면에 임팩트 있는 그림을 걸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어요. 한옥은 나무의 성질이 강해 작품을 걸었을 때 조화를 이루기 어렵지만, 그림을 한 점 정도 주기적으로 바꿔 걸며 마치 갤러리처럼 연출하고 싶었거든요.
벽에 걸린 건 어떤 작품인가요?
유영준이라는 작가의 작품이에요.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미술 잡지를 만들던 20대에 작가론을 썼던 화가인데 지금까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눌 정도로 인연이 깊어요. 서로의 멘토이자 멘티인 셈인데, 저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영감을 받고 그에게 미학, 철학, 영화 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우정을 쌓아왔어요. 유영준 작가는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도상을 한 화면에 병치해 거칠고도 충동적으로 작품을 완성해요. 그것이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주기도 해요.
회화 작품을 볼 때 어떤 점에 끌리고 영향을 받나요?
작품에서 보여지는 형식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그림 속에 담긴 작가의 내면을 읽어보려고 해요.

아트 컬렉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소목장이 만든 소반 같은 작은 목물과 백자, 제기 등의 소품으로부터 시작했어요. 요즘은 민화의 매력에 푹 빠져 민화를 차근차근 모으고 있어요. 민화는 옥션을 통해 사기도 하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골동품상을 통해 사기도 해요.
수집하는 작품의 폭이 매우 넓네요.
매우 다양해요. 동시대 작가의 페인팅부터 젊은 신진 작가의 작품, 현대 공예 작품도 좋아해요.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젊은 에너지가 담긴 작품이 좋더라고요. 저는 공간의 밸런스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오래된 물건일수록 아크릴이나 플라스틱처럼 가벼운 느낌이 드는 재질과 배치하고 신진 작가의 작품은 앤티크 가구와 어우러지게 두는 편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이 민화에 관심을 갖고 소장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세련된 취향으로 여겨져요.
민화의 매력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민화는 한국식 팝아트예요. 해학적이고 경쾌하고 자유분방하죠. 질서를 깨고 형식을 배반하면서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느낌이 들어요. 기존 미술사에서는 민화를 상징과 알레고리로 파악하는 데 치중하지만, 저는 그저 하나의 ‘조형’으로 봐요. 그 조형이야말로 정말로 컨템포러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이죠! 그래서 저는 민화를 최고로 에술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민화는 제주 민화인데, 제주 민화는 중앙(한양)으로부터 소외되어, 간섭을 덜 받았기 때문에 제멋대로이면서 자율적이에요. 특히 제주 문자도를 좋아하는데, 커다란 획 안에 제주 고유의 돌과 바람, 물고기 등의 자연이 천연덕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요. 그것을 볼 때마다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해요.
벽에 걸린 그릇 컬렉션도 인상적이에요.
저는 도자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고려청자, 조선 분청, 백자 그리고 현대 일본 작가와 한국 도예 작가의 작품까지 골고루 수집하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다완과 사발을 좋아해요. 다완은 너무 고가라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언제나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형태죠. 긴 세월을 이길 자가 없듯이 옛 그릇만큼 매력적인 현대의 그릇을 만나기는 힘들어요. 아크릴 선반은 지금까지 모은 도자기를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직접 제작했어요.
앤티크 물건은 주로 어디서 구매하나요?
1년에 두어 차례 인사동에서 고미술아트페어가 열려요. 몇 년동안 이곳에서 다완과 사발을 구입했어요. 창원, 마산, 창령 같은 지역에서 온 도자기가 형태와 가격도 좋았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이렇게 페어가 열릴 때 유심히 보고, 지방에 방문하면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민화나 옛 작품을 취급해 온 셀러들을 만나곤 해요.
소장품을 판매하기도 하나요?
그럼요. 작품도 하나의 인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작품의 여정이 시작되는 거죠. 미술 애호가나 큐레이터, 평론가에게 갈 수도 있고 미술관에 소장되기도 하는데, 저는 한 작품을 누군가 영원히 소장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을 거쳐가며 이야기가 쌓이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여러 번 소장전을 하면서 새로운 물건, 새로운 작품을 들였어요. 진화의 과정이라고 봐요.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했나요?
2월 초에 서촌에 있는 무목적 갤러리에서 저처럼 빈티지 소품과 그릇, 공예품을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팝업 스토어를 열었어요. 각자 소장품을 가져와 판매했고요. 4월에는 제가 소장하고 있는 민화를 위주로 전시를 열 계획이에요.
아끼는 작품이나 물건의 경우 떠나보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아끼던 작품이 있었어요. 로사 로이라는 독일 작가의 근사한 회화 작품이었는데 이 집을 지으면서 팔았어요. 리모델링하며 추가 예산이 필요해져 그 작품을 팔아서 충당했거든요. 효자죠.(웃음) 돈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산 건 아니지만 작품 가격도 올랐고 좋은 분에게 전해져서 마음이 좋아요. 저는 이렇게 컬렉션을 판매해 위기의 순간을 넘긴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좋은 컬렉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작품 이외에 수집하는 것이 있나요?
바다 양식장에서 물에 둥둥 띄워놓는 부표 아시죠? 예전에는 부표를 유리로 만들었어요. 이베이에서 그 유리 부표가 올라올 때마다 구매해서 모아요. 이걸 아크릴 상자에 넣어두면 멋진 오브제가 돼요. 유리 부표는 직접 입으로 불어 만들었기 때문에 형태가 모두 다르고 독특한 유리 질감이 살아 있어요. 찌그러진 것도 있고 기포가 들어 있는 것도 있고 모양이 다양하거든요.
유예소에서는 어떤 강의가 열리나요?
미술사를 기본으로 미학, 철학, 신화학, 정신분석학 등을 통섭하는 강의를 진행하고 있어요. 이것이 미술사만 다루는 수업과 차별되는 점이라고 봐요. 또 문학과 영화도 곁들여 풍부한 정보와 담론을 담아 이야기해요.
서재에 책이 엄청나게 많네요.
지금은 미술에 관한 책만 모아뒀어요. 언제부턴가 공부가 참 재미있더라고요. 제가 학사과정은 국문학, 석사과정은 미학, 박사과정은 정신분석학을 전공했거든요. 궁금한 게 너무 많고 인간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요. 최근에는 명리학에 관심이 많아져 공부하고 있어요. 인문학이란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집은 프라이빗한 장소잖아요. 집에서 강의를 하거나 파티를 여는 것은 어떤 즐거움이 있나요?
라캉은 ‘어차피 우리는 뒤통수에 죽음이 달려 있고, 환상을 좇으며 사는 것’이라고 했어요. 저에게는 예술과 공부가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는 힘을 주는 일종의 환상 같은 거예요. 따라서 척박하고 비천한 삶 가까이에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하는 환상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저와 같은 환상을 가질 수 있게끔 물건 하나하나도 좋은 것, 특별한 것을 가져다 두려고 해요.
예술 애호가로서 욕심 나는 분야가 더 있나요?
어렸을 때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사실 그림을 잘 그렸지만 기자가 되고 싶어서 국문과에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미술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 석사과정으로 미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저는 카르마(업보)를 믿어요. 이번 생의 제 운명은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아마 다음 생에 태어나면 좋은 작가가 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번 생에 꼭 해야지’라는 강박이 있었는데, 이번 생에 꼭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