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슥 그린 것 같은데 굉장히 근사해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나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전공은 건축이지만 그림 그리는 일로 아르바이트도 하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플리마켓에 내다 파는 등 미술에 관한 일을 다양하게 이어왔어요.
본업은 문구 브랜드 디자이너고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정하려니 막막하더라고요. 방황도 했어요. 건축 쪽은 아닌 것 같고 프리랜서로 그림을 그려 먹고살기에는 불안하고. 결국 ‘관심 있는 것에 모두 지원해 보자’는 마음으로 건축, 브랜딩, 디자인 회사 등 다양하게 지원했어요. 가장 먼저 연락 온 곳이 문구 회사였고,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문구 브랜드 디자이너로 시작했어요. 회사에서는 다이어리, 달력, 노트,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등의 기획부터 패키징, 마케팅까지 전 과정을 담당해요. 저는 제가 문구 브랜드에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최근에는 이직을 했잖아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실력과 인지도를 쌓았는데 회사 일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나요?
퇴사 후 고민을 많이 했어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나가볼까, 회사 생활을 더 해볼까. 그런데 프리랜서는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회사 생활은 지금 아니면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과 디자인 모두 좋아하는데 회사에서 해소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회사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니까요.
결국 둘 다 하게 된 거네요.
제가 일 욕심도 많고 가만히 쉬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스스로 게으른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몸은 바쁘고 힘들지만 그게 좋아요.
회사에서의 반응은 어떤가요?
최근에 이직한 회사에서는 제가 이하여백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걸 지지해 주고 개인과 회사가 함께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죠. 사실 처음에는 그림은 디자인과 다른 분야이고 개인적인 취미 영역이라고 여기면서 그림은 일과 별개의 활동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이하여백으로서 이렇게나 성장할 줄 몰랐고요. 그림으로 시작해서 점점 독립 출판물도 만들고 이벤트 굿즈도 제작하다 보니 본업과 연관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발생할 만한 것은 주의하면서 의식적으로 일과 그림을 구분하려고 해요.
시간이 무척 중요하겠어요.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하는 것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업무 시간에는 회사 일에 집중하고 개인 작업은 거의 밤에 하는 편이에요. 간혹 아침까지 할 때도 있고요. 요즘에는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평일 저녁에 시간 여유가 없어서 개인 작업은 주말에 몰아서 해요.
이진슬 님 그림에는 일상이 녹아 있는 듯 보여요.
저는 책상 위에 있는 것을 그냥 끄적거리거나 제 눈앞에 보이는 것, 길 가다 발견한 새로운 것, 제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장면을 주로 그려요. 저의 서울살이가 이제 5년 차인데요,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이방인의 눈으로 본 서울의 모습, 이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무언가를 발견해 보려는 생각으로 살펴본 도시의 일상도 그렸어요. 또 운동으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재발견한 한강의 모습 등 생활에서 발견한 장면을 기록하듯 그림으로 남겼어요.
여행에 관한 그림도 많던데요.
여행지에서 너무 사고 싶은데 사지 못하는 그런 게 생길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걸 그리기도 하고, 짐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을 그림으로 대신 남기기도 하고. 또 풍경이나 건물 등 인상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면 여행지에 대한 기억과 감상을 저만의 방법으로 더 짙게 남길 수 있고, 여행하는 동안 제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이진슬 님의 그림은 기록으로서의 힘도 느껴져요.
저는 그림 또한 기록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기록의 수단인 거죠. 그래서 글, 사진, 영상 등 무엇이든 기록해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된다고 믿어요. 내가 뭘 했는지 같은 가벼운 일상에 관한 것이더라도 모이면 모일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최근에 박물관을 갔는데 유리장 안에 누군가의 스크랩북이 있었어요. 종이는 다 삭아서 너덜너덜한데 그 위에 뭔가 붙어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별거 아닌 라벨 같은 것이었을 텐데 이제는 박물관에서 보관할 정도의 가치가 생긴 것이지요. 일상의 기록이 어느새 큰 의미가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어요.
분명 이진슬 님이 가지고 있는 수십 권의 노트도 유의미한 기록이 될 거예요.
나중에 제가 할머니가 돼서 서재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데 제가 남긴 기록이 쫙 놓여 있는 상상을 해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서 기록해 나가는 것이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재료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어요.
제게 맞는 재료를 찾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써봤어요. 처음에는 연필과 색연필의 속성이 잘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동안 많이 사용했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재료를 시도해 보며 작업의 범위를 계속 넓혀 가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물감도 사용하고 더욱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다른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릴 때 태도 또한 달라지는 게 있나요?
물감을 처음 사용하면서 느낀 게 마음의 평안이었어요. 붓으로 물감을 섞거나 칠할 때 부들부들한 그 느낌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성격도 급하고 거친 편인 제가 가만히 앉아서 3시간이나 몰두하게 되더라고요. 재료 다루는 기술을 익히고 그림을 완성하는 걸 떠나서 그 순간 몰입한 것 자체에 감탄했죠. ‘물감이 이런 경험을 만들어주네?’ 하면서요. 요즘은 무엇이든 ‘빠르게, 짧게, 쉽게’ 하는 것을 지향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제 개인적인 성향이나 마음가짐에도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사이즈 역시 표현의 영역을 넓히는 요소일 것 같아요.
분명 작품의 크기에서 느껴지는 그림의 분위기나 존재감, 영향력이 있잖아요. 연필과 색연필을 사용할 때는 큰 크림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서 작은 그림 위주로 그렸는데, 저 외에도 그림의 크기를 아쉬워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이즈와 재료를 다양하게 시도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더 들었어요. 다행히 최근에 A32에서 전시를 열 기회가 생겨서 원 없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준비했어요.
전시에서는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제가 본 장면, 기억에 남은 인상, 저의 내면에 관해 주로 그렸다면 이번에는 제가 상상하는 장면이나 풍경을 그려요. 실제로 제가 본 장면이라기보다는 그 앞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미지요. 제 이야기보다는 같이 보고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더라고요. 제가 보고 관심 가는 것이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 가는 것 같아요.
지난해 직접 만든 책으로 퍼블리셔스테이블에도 참여했죠.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 달 정도 여행을 하던 중에 퍼블리셔스테이블 참가자 모집 공고가 났어요. 관심은 가는데 내가 정말 저기 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좀 되더라고요. 꽤 이름 있는 페어이기도 하고, 출판 페어라면 부산에 있을 때도 틈틈이 나갔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거의 안 나갔거든요. 그래도 ‘책으로 엮으면 여행에서 기록하고 모은 것을 정리할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신청했어요. 결국 참가자로 선정이 됐고, 데드라인이 생겼으니 일정에 맞춰 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중요하죠, 데드라인.
다 쏟아부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짧은 기간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원 없이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남은 퇴직금을 모두 털어 올인했어요. ‘이렇게 하고 나면 또 뭔가 새로운 게 생길 거야. 다음 일은 그 뒤에 생각하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말 정성을 다했어요.
만드는 과정에서 신경 쓴 것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다녀온 여행에 관한 것을 엮은 책이잖아요. 독자들 역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었을 때 각자 여행의 의미가 떠오르게 되기를 바랐어요. 실제로 어딘가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듯 제가 여행지에서 수집한 장면, 발견한 의미를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또 이미지가 중요한 장면은 엽서로도 만들고 책갈피도 만들었어요. 이렇게 제가 만든 것을 예쁘게 담아내기 위해서 포장에도 무척 신경 썼죠.
디자이너로서 활약을 보여줬을 것 같아요.
제가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게 언제부턴가 되게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림을 그리는 역할에 디자인 능력이 더해지면 작업 세계를 구성해 내는 기획력과 전달력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해요. 보통 회사에서는 아이디어를 내고 상품을 기획하고, 또 그 결과물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잖아요. 이 과정이 제 역량을 만들었다고 봐요. 제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더 경험하고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인 것 같아요.
행사는 어땠어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와주셔서 무척 기뻤죠. 그리고 그동안 제가 성장했다는 것을 처음 실감한 자리였어요. 이전까지는 팔로워 수, ‘좋아요’ 수 같은 지표로만 반응을 확인했는데, 실제로 사람을 만나서 인사하고 의견을 주고받으니 훨씬 더 깊이 와닿더라고요. 사람들이 제 부스를 찾아오고, 제 책을 사고, 인사를 건네고, 심지어 편지를 주고 가는 분도 계셨어요. 행사 기간 동안 신나고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 책임감 등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어요. 또 내가 이런 것에 갈증이 있었다는 깨달음,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었고요. 동기부여가 확실히 되더라고요. 욕심도 더 생기고.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만큼 소중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자기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데드라인이 있으면 움직이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았고요.(웃음) 이렇게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고 동기를 일으키는 것이 뭔지 잘 생각해 보고 인지하는 것, 자극이 될 만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뮤직비디오 아트워크에도 참여했죠? 이런 새로운 경험 또한 큰 동기부여가 될 듯해요.
네. 되게 새롭더라고요. 내 그림이 뮤직비디오라는 매체에 나오는 것 또한 처음이고 신기한 일이니까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참여하게 되어 뿌듯하고 꿈같기도 했어요. 작년에 벌어진 이런 일들이 일러스트레이터나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정체성을 강화하고 성장하는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독립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지금은 회사 생활을 통해 배우는 것도 좋고, 제 시간을 활용해 호흡을 이어나가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궁극적으로는 제가 브랜드를 만든다거나 작가 혹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은데 일부러 아주 멀리까지는 내다보지 않으려고 해요. 언젠가 확신이 드는 날이 올 거라고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