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이사하신다면서요.
네, 직장 때문에 잠시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이제 한 집에 살게 됐어요. 짐 정리는 아직 멀었어요. 소장하고 있는 건담 프라모델도 더 챙겨야하고, 조립과 도색을 위한 도구들 정리는 아직 손도 못댔어요.
원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장비들은 다 어디로 가나요?
다 저와 함께 이사해요. 새 집에 더 큰 작업실을 꾸밀 예정이에요.
가족들이 취미를 응원해주는군요.
‘왜 아직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니?’ ‘조카한테 줘라’ 같은 말도 듣죠. 다행히 아내는 저의 이런 취미를 예쁘게 봐줘요. 여기 이 붉은색 프라모델 ‘나이팅게일’도 아내가 선물해줬어요. 예쁘죠? 제가 제일 아끼는 거예요.
곧 스스로 움직일 것마냥 정교한데요. 직접 조립하고 도색했나요?
이건 완성품을 구매한 거예요.
‘완성품’이 뭐예요?
프라모델을 출시하는 회사에서 조립과 도색까지 모두 마친 후 내보내는 제품을 완성품이라고 불러요. 조립부터 칠, 스티커 작업까지 전부 사람 손으로 한다고 해요.
이런 게 몇 개나 있어요?
많이 모으시는 분들은 한쪽 벽면을 다 채울 정도인데, 전 그정도는 아니예요. 완성품이 아닌 박스 제품도 미리 사두었다가 안 만들 것 같아서 커뮤니티나 당근마켓에 팔 때도 있어요.
아, 조립하고 싶은 게 있을 때 하나씩 사는 게 아니라 미리 일정량을 구매해 두기도 하나요?
사실은 할인 시즌에 제 소비욕을 제어할 수 없었던 탓이죠.
완성품과 조립품 중 뭐가 더 좋아요?
저는 직접 조립하고 도색을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본업이 뭔가요?
로봇을 만들어요.
그렇다면, 혹시 덕업일치?
아니요. 저는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서비스 로봇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어요. 로봇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 뒤엔 그게 실제로 실현 가능한 발상인지 구현을 해보는 단계가 필요해요. 엔지니어와 개발자가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맡아 개발하고 구현가능성(Feasibility)을 따져보는 거죠. 저는 그 단계에서 개발자의 역할을 하는 거고요.
요즘은 어떤 로봇을 만들고 있어요?
회사에서는 무거운 커넥터로 인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전기차 자동 충전 로봇(Auto Charging Robot)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고요, 집에선 ‘RG 하이뉴 건담 RX-93-V2’을 만드는 중이에요.
건담 만드는 걸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나이로는 6~7살 정도요. 200원 쯤 하는 사탕을 사면 손바닥만한 로봇 장난감이 들어있었는데, 그걸 사서 조립했던 기억이 나요. 러너(파츠가 붙어있는 플라스틱 패널)에 달려있는 부품을 깔끔하게 자르려고 손톱깎이로 잘라내기도 하고.
지금도 손톱깎이를 쓰나요?
지금은 니퍼를 써요.
도색을 하는 과정이 궁금해요.
혹시 네일샵 가보신 적 있나요? 매니큐어링을 하는 과정이랑 비슷해요. 우선 니퍼로 플라스틱 금형에 달려있는 모든 부품을 하나씩 떼어냅니다. 떼어낸 부분엔 작은 거스러미가 남는데, 이것까지 꼼꼼히 제거해줘야 해요. 그리고 각 파츠(부품)의 겉면을 사포질을 여러 번해서 결을 닦아줍니다. 이때 400방, 600방, 800방, 1000방 사포를 차례로 써야 자국 없이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어요.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네요.
아직 끝이 아니에요. 에어 브러시와 콤프레셔를 사용해서 서페이서를 올려야 해요. 서페이서는 원하는 컬러가 잘 나오도록 밑바탕을 칠하는 작업인데요. 이 작업까지 마치면 도색 준비 완료입니다. 이제 각 부품마다 원하는 도료(우레탄, 메탈릭, 반광, 유광 등)를 입히고 마지막으로 마감재도 마무리합니다.
프라모델 도색용 도료도 따로 있지요?
저는 미스터 하비(군제)라는 제조사에서 제작한 라카 도료를 가장 많이 써요. 타미야 사에서 출시한 도료와 국내 제조사 IPP의 제품도 많이 쓰고요. 에나멜 도료보다 건조 속도가 빨라서 작업 효율이 좋더라고요. 마감 단계에 쓰는 도료도 재미있어요. 무광, 유광, 반광 등으로 질감을 다양하게 낼 수 있거든요.
칠을 마치면 도색 작업이 마무리되는 거죠?
아니에요. 건조를 해야죠. 여기 제 보물인 건조기가 있습니다.
식기건조기처럼 생겼네요?
식기건조기예요. 꽤 많은 프라모델러들이 건조 장비로 쓴답니다. 우레탄의 경우 4-5일정도 자연건조를 시켜야하는데요. 식기 건조기를 쓰면 하루만에도 말라요.
프라모델러들 사이에서 도색 부품 잘 말리기로 소문난 식기건조기가 있나요?
없어요.(웃음)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 등에서 적당한 가격의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사면 됩니다.
이렇게 프라모델 하나를 완성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대중없죠. 머리, 팔, 무기 등 각 부위를 완성하는 데에 총 2-3시간 정도가 걸리는 것 같아요. 퇴근 후 조금씩 여러 날에 걸쳐 하다 보니 오래 걸리는 것일 뿐.
건담 프라모델을 좋아하다 보면 자연히 직접 도색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나요?
개인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달라요. 조립만 하는 사람, 채색까지 완료된 완성품을 모으는 사람, 고수인 프라모델러에게 조립과 도색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고수를 어디서 만나요?
커뮤니티요. 대표적인 커뮤니티는 네이버 카페 ‘모두의 건프라’와 루리웹이예요. 외국에 있는 고수들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많이 활동하는 것 같아요.
커뮤니티 안에서 친구가 되기도 하겠어요.
친해진 또래 분들이랑 만든 단톡방이 있어요. 아저씨들끼리 가끔 술 한 잔 기울이며 사는 얘기 했다가, 건담 얘기 했다가, 또 사는 얘기, 다시 건담 얘기 하는 그런 방이요. 저는 단톡방에 ‘아내가 건담 사줬다’는 자랑도 늘어놔요. 다들 ‘너 전생에 이순신 장군 밑에서 노 젓기 정도는 했던 것 같다’고 해요. 엄청 부러워하는 거죠.
이 신에서 ‘프라모델 계의 에르메스’로 군림하는 브랜드가 있나요?
타미야, 고토부키야처럼 잘 알려진 메이커도 있고, 국내 브랜드 아카데미도 있지만... 최고는 반다이인것 같아요. 물량도 많고, 가격도 더 저렴하고, 완성도는 높죠. 독보적이에요. 금형을 직접 만드는 공장까지 소유하고 있는 곳은 반다이가 유일한 걸로 알고 있어요.
현철 씨가 가장 최근에 제작한 프라모델을 구경해도 될까요?
이거예요. 타미야에서 구매한 오토바이 프라모델이요. 영화 <탑건 : 매버릭>에 톰 크루즈가 타고 등장했던 모델인데요. 디자인이 너무 멋져서 완전히 반했고, 정말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제가 디테일을.. 이정도면 작품 아닌가 혼자 생각해볼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원래 오토바이에 로망이 있나요?
타는 것에 대한 로망은 없어요.
이거 진짜 오토바이 같아요. 지금 바로 시동 걸면 앞으로 갈 것 같아요.
그냥 플라스틱이예요. 바퀴 빼고는 전부 도색하고, 크롬 코팅을 입히고, 실물처럼 스티커를 붙이니까 진짜 오토바이처럼 보이죠?
제일 손이 많이 간 부분은 어디예요?
여기, 오토바이 카울(Cowl, 오토바이 앞면을 덮는 커버를 이르는 말) 부분이에요. ‘카본 데칼’이라는 카본 소재와 같은 패턴과 질감의 스티커가 있어요. 필름처럼 씌우는 게 아니고, 섬유 조직 모양의 스티커를 하나 하나 손수 붙여야하는데요. 라인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엄청 공들였어요. 보세요, 라인도 잘 맞고 간격도 일정하죠? 바퀴 쪽 디스크 휠에 난 작은 구멍도 직접 뚫었어요. 이러면 훨씬 실감나게 구현되죠.
작업을 마치고나면 기분이 어때요?
솔직히 프라모델 도색 작업이 힘들거든요. 작업 난이도가 높거나 어려운 건 아니지만 단순 작업을 계속 반복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완전히 집중할 때 마치 명상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남아있던 업무 스트레스도 잊게 되고요. 또 커뮤니티에 올린 작업 사진에 좋은 댓글이 달리면 엄청 뿌듯해요.누가 관심을 갖고 봐주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 취미를 꽤 오래 지속했잖아요. 효율적으로 취미를 즐기는 나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 같아요.
도색을 할 때는 무기나 악세서리처럼 중요도가 비교적 낮은 부품부터 칠해야 돼요. 본체를 먼저 칠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작은 부품을 만들 육체적, 정신적 체력이 안남거든요. 사람 마음이 참 그래요. 본체를 완성하고 나면 아직 안 끝났는데도 다 했다고 믿고 싶어져요.
그래서 지금도 식기 건조기에 본체 없이 방패만 들어있는 건가요? 완성된 모습이 궁금해져요.
네, 저도 너무 궁금해요. 제가 저를 기다려주는 수 밖에 없겠죠.
다른 프라모델 분야에도 도전할 생각이 있나요?
아니요. 밀리터리나 비행기 같은 건 제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아닌 것 같아요. 건담은 워낙 좋아하고, 그게 아니래도 로봇이 제일 멋지다고 생각해요. 특히 공룡 로봇. 아마 모든 남자들의 로망일 걸요?
건담을 많이 모으는 것과 완벽하게 만드는 것,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한다면요?
완벽하게 만드는 쪽이 더 좋아요.
언젠가 꼭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게 있어요?
리스트가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제일 제대로 만들고 싶은 건 PG(Perfect Grade, 반다이 사에서 출시한 시리즈 중 가장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은 단계의 건담 프라모델 라인) 시리즈 중 언리쉬드(Unleashed) 퍼스트 건담이예요.
사람들에게 의뢰를 받고 작업하는 전문 모델러가 되어 볼 계획도 있나요?
모르겠어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것도 일이되면 부담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지금도 스트레스가 있지만, 이건 건강한 스트레스니까 즐길 수 있어요. 저에게 취미란 결국 로망을 실현하는 거예요. 뭔가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아이가 있나요?
20개월 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아파요.
혹시 나중에 아이가 건담 프라모델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한다면?
아, 그건 안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