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후기

[라이프집에세이] 가을 텃밭에 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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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집

2023.09.27 16:53

조회수 2189



about #라이프집에세이
#라이프집에세이는 개성적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크리에이터의 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면, 라이프집 에세이에서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 






📝 writer. 김미리(@suful415, @merrymiry) 

몇 년 전 쓰러져 가는 시골 폐가를 덜컥 사버린 후,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서울에 발붙이고 바삐 살다, 금요일이 되면 시골집으로 퇴근해 찬찬히 삽니다. 

12년간 다양한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MD로 일하다, 최근 퇴사했습니다. 현재는 글 쓰는 작가이자 프리랜서 브랜드 인큐베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에세이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를 썼고, 온라인으로 『퇴사원 주간보고』와 『계절편지』를 연재 중입니다. 




© 김미리


주방 창가에 서서 빛의 기운이 작게 남은 텃밭을 내다본다. 
그러다 뒤늦게 안다. 
오늘 텃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도 함께 심겼다는 것을. 
이제는 기다리는 일, 지켜보는 일, 땅의 힘을 믿는 일만 남았다.
 


⊹ 


가을 텃밭에 심은 것 



아침부터 이웃집 텃밭을 힐긋거린다. 정갈한 이랑 위에 줄 맞춰 심긴 배추 모종들이 보인다. 어르신은 벌써 다 심으셨네, 나는 아직 밭도 못 갈았는데…….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주방으로 돌아와 차를 우린다. 그러면서도 어르신의 텃밭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결국 마음이 급해져 마시던 차를 대충 털어 넣고, 서둘러 마당으로 나선다.

순찰하듯 마당을 둘러보다 꽃송이를 떨군 배롱나무 앞에서 멈춰 선다. 여름 내내 분홍빛으로 화단을 지키던 배롱나무꽃. 그 꽃이 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여름이 물러나고 있다는 뜻,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앞마당을 비잉 돌아 뒷마당 텃밭으로 들어선다. 감자와 옥수수를 수확하고 비워두었던 텃밭이 어느새 자란 잡초로 무성하다. “아니, 지난 주말에 다 뽑았는데 언제 또 이렇게 난 거야. 이번 주도 풀 뽑다 끝나겠네.” 입은 투덜거려도, 손은 어느새 잡초를 뽑고 있다.



© 김미리


주말이 되면 이곳에 산다. 서울에서 2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자리한 집. 앞마당엔 화단이, 뒷마당엔 텃밭이 있는 작은 한옥집. 과거엔 귀신의 집, 흉가, 폐가로 불렸으나 지금은 다정히 수풀집이라 불리는 나의 집.

주말마다 이 집에서 N잡러를 자처하며 살고 있다. 성실하지만 손끝이 야물지는 않은 주택관리사, 삼시 세끼를 책임지는 요리사, 꽃보다 잡초가 많은 화단의 정원사, 작은 텃밭을 돌보는 농부, 마당 고양이 급식소 운영자, 동네 개들의 산책 도우미, 앞집 할머니의 브런치 메이트. 이 직업들은 계절 따라 성수기와 비수기를 겪는다. 오늘부터 성수기에 접어든 직업은 농부다. 가을 농사를 시작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가을볕 아래 텃밭에서 서둘러 잡초를 뽑는다. 돌을 고르고, 괭이질한다. 밭을 오가며 반나절쯤 보냈을까. 일곱 개의 이랑이 두두룩히 만들어졌다. 그러면 나는 차에 시동을 건다. 엉덩이와 소매엔 흙을 잔뜩 묻힌 채,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 목적지는 읍내에 있는 종묘사다. 작물의 씨앗이나 모종, 묘목 같은 걸 파는 곳으로 시골살이를 시작한 후 계절마다 들르는 장소 중 하나다. 종묘사에서는 배추 모종 두 줄과 무씨를 산다. 큰 바구니에 하나가 오천 원이라는 쪽파 종구는 천 원어치만 살 수 있는지 조심스레 여쭙는다. 사장님은 흙 묻은 내 옷차림을 스윽 보시더니 시원하게 외치신다. “오케이!” 덕분에 올해 김장을 책임질 배추, 무, 쪽파 삼총사가 무사히 결성되었다.

그들을 조수석에 안전히 모신 뒤엔 지체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만들어 둔 두둑에 배추 모종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심는다. 무씨는 한 구멍에 서너 개씩 넣은 후 포슬포슬 흙을 덮는다. 사이사이 매서운 가을 모기에게 헌혈하는 것도, 새참을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는다. 쪽파 종구는 겉껍질과 수염뿌리를 정리하고 적당한 크기로 쪼갠다. 그리고 윗부분을 잘라 작은 생채기를 낸 뒤 손가락 두 마디 깊이로 심는다.





© 김미리


4년 차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초보 농부다. 그래서 이웃 어르신이 심으면 심고, 거두면 거두는 눈치 농사를 지향한다. 농사 스승인 앞집 할머니께 부지런히 농사 특강도 듣는다. 배춧속이 차오르면 배춧잎을 들춰 속을 파먹는 벌레를 잡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더 배울 필요 없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있다.

여린 배춧잎이 점차 커다래지고 속을 채워나가는 것, 쌀알만 한 무 씨앗이 지면 위로 푸르스름하고 단단한 이마를 내미는 것, 쪽파 종구가 작은 생채기에서 푸른 줄기를 통통하게 올리는 것. 그것은 농부 홀로 해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사로운 가을의 햇빛, 선선한 바람, 새벽이슬, 차분히 겨울로 향하는 추위가 함께 해야 한다. 농부는 언제나 계절과 손발을 맞추며 일한다. 그러니 마주한 일기(日氣)에 감사하고 다가올 일기(日氣)를 차근히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텃밭에 물을 흠뻑 주는 것으로 오늘의 업무를 마무리한다. 어느새 어둑해진 마당을 뒤로하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부터 챙겨 먹고 대청마루에 앉아 별구경을 해야지 다짐하며. 주방 창가에 서서 빛의 기운이 작게 남은 텃밭을 내다본다. 그러다 뒤늦게 안다. 오늘 텃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도 함께 심겼다는 것을. 이제는 기다리는 일, 지켜보는 일, 땅의 힘을 믿는 일만 남았다. 밤이 깊어지고 가을도 깊어진다.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원한다. 그렇게 넓어진 마음 밭에 소박한 행복의 씨앗을 심고 돌보는 날들이 계속될 수 있기를.


Credit
Editor Haeseo Kim
Design Jaehyung Park
Production SIDE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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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쪼말

직접 키워 먹음 더맛있겠어용 부럽습니당

2024.09.05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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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 멋지고 부러워요

2024.08.25 23: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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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우와 버려진 폐가를 사들이고 예쁘게 꾸며 하나의 힐링 아지트를 만드셨네요. 너무 낭만적이고 예뻐요. 그 과감함과 모험력?이 엄청 놀랍고 부럽습니다. 나만의 텃밭을 꾸미는 재미도 쏠쏠하겠어요.

2024.08.23 06:1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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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최고

파!! 진짜 해보고시포요

2024.08.19 22:5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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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14

식물을 키우는건 진짜 정성이 필수죠!! 초보여도 꾸준히 해나아가시는 모습이 멋집니다^^

2024.08.19 00:4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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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르트

저도 직접 텃밭 가꿔보고 싶어요~

2024.08.16 13: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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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

텃밭도 텃밭이지만 집이랑 분위기가 진짜 너무 예쁘네요ㅠㅠ

2024.08.15 02:3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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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니티니

농사와 정말 안맞다 생각했는데 점점 내가 먹을 정도만 키우고 싶단 생각이 자주 들어요! 덜컥 집을 산 용기가 대단해요. 저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삶을 가꿔보고 싶어요. :)

2024.08.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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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0

텃밭을 가꿔보고싶네요

2024.08.0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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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포

한옥감성 너무 좋네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예뻐요!!

2024.08.0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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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지

직접키운 먹거리라니... ❤️ 더 애정갈 것 같아 하나하나 정성껏 요리하게될 것 같네요! 창밖 뷰도 진짜 끝내줍니다❤️

2024.08.08 04: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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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우

한옥만의 정취가 있죠 직접 키운걸 먹으면 싱싱하고, 뿌듯할 거 같아요

2024.08.04 01:4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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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두유

아이 다 키우고 작지만 예쁜 집에서 먹을 것만 키우고 싶은 로망~~♡

2024.08.0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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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더쿠

한옥집 너무 예뻐요^^ 저두 창가옆에 앉아있고 싶네요:)

2024.07.3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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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

저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행복하세요

2024.07.26 15:3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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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

식물 키우며 얻는 기쁨 참 크죠.

2024.07.26 15:3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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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옥

예날 생각나고 좋네요 이런집에 살아보고 싶어요 스트레스 확 날라겠는데요

2024.07.24 23:4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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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이

멀리서 보기엔 너무 부러운 집인데 실제로도 좋을거 같아요

2024.07.22 15:5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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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조앙

멋지네요. 은퇴하면 저런집에서 살고파요

2024.07.21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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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_Code_Anna

우와~ 저도 이렇게 살고 싶어요오~ 🙏🏻🥹🥹

2024.07.19 18: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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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씨

제 로망이예요. 힐링 하고 가요

2024.07.1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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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댁

저는 당근과 상추를 심었어요.텃밭 가꾸는게 제 소소한 낙이랍니다. 이쁜 공간을 보며 힐링하고 가요~

2024.07.1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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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녹차

텃밭 가꾸기 좋아보여요 저도 넓은 곳에서 이것저것 심고 싶네요ㅜㅜ현실은 방울토마토 겨우 하나 심기..

2024.07.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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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경0

저의 버킷리스트를 대리만족 시켜주시는 작가님의 삶이 예쁘고 보기 좋아요♡

2024.07.09 18:5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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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쟁이

저도 실현시키고싶은 꿈이네요^^ 응원합니다

2024.07.0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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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0

4년차 초보농부 저도 꿈꾸는 삶이네요~ 멋져요

2024.07.0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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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0

진짜 부러운 공간이에요

2024.07.02 14: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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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쏭쿠

가드닝 해보고 싶어요!

2024.07.02 08:3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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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윗홈0

내 버킷리스트예요!

2024.06.0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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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d

기회가 된다면 저도 텃밭의 낭만을 느끼고 싶어요 :)

2024.06.03 13: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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