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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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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산다

2026.03.27 11:46

조회수 122


도라지는 소금물에 몸을 누여 제 안의 아린 기억을 씻어내고, 식초 한 방울의 생기를 빌려 하얀 속살을 지켜냅니다. 곁에 누운 연근은 맑은 물속에서 변치 않는 희끄무레한 빛을 머금으며 정갈한 동행을 시작합니다. 살짝 볶아낸 연근이 간장과 물엿을 만나 은근한 불 위에서 보석 같은 윤기를 입습니다.
투명하게 비치는 갈색 빛깔 속에 짭조름한 약속과 달콤한 위로가 천천히 스며듭니다. 서두르지 않는 불길이 빚어낸 그 쫀득한 질감에는, 조용히 냄비 앞을 지키던 정성 어린 마음이 켜켜이 고여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콩나물이 맑은 물에 씻겨 올라와 뜨거운 김 속에서 아삭한 생명력을 피워 올리고, 소쿠리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제 차례를 기다립니다.



참으로 한국음식은 기다림과 손길의 예술입니다.

어둠이 내린 전날 밤부터 차가운 물속에서 핏물을 비워낸 양지는, 한 번의 끓음으로 잡된 것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깊은 솥 안에서 진정한 육수로 거듭납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이 고된 여정은 오직 누군가를 먹이겠다는 지극한 마음뿐입니다.

잘 익은 고기를 결대로 일일이 찢어내는 손끝에는 마늘과 생강의 알싸함과 참기름의 고소한 온기가 배어듭니다.

고추기름의 붉은 불꽃 위에서 달달 볶아진 고기는 대파와 마늘의 향을 입고, 진한 사골육수를 만나 비로소 깊고 푸근한 바다를 이룹니다.

수 시간의 긴 인내 끝에 솥 안의 모든 재료가 서로의 맛을 닮아갈 때,

비로소 "정성"이라는 이름의 따스한 밥상이 차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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