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집에세이] 부엌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2023.10.25 16:46 조회수 1034

about #라이프집에세이
#라이프집에세이는 개성적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크리에이터의 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행하는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면, 라이프집 에세이에서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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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er. 조한별(@sik__kuu) 
자연이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음식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먹고 감사하고 짓고 씁니다.

많은 시간 월급 노동자로 살고, 남은 시간에는 음식에 관한 글을 씁니다. 책 『젓가락질 너는 자유다』를 썼습니다.





©조한별



신문지 포장을 걷어 내니 강렬하게 퍼져 나오는 맵싸한 향기. 
먼 길을 달려온 흙의 정령이 램프 속 지니처럼 
별안간 기지개를 켜 부엌을 장악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강렬한 기운에 사로잡힌 채 
고향에서 보낸 한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발끝이 축축해지고 손톱에 까만 알갱이들이 밀려들던 때. 
 


  


부엌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초인종과 함께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가볍게 달려가 문을 열고 기꺼이 그를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품에 안고 부엌으로 가 봉인을 풀어 마주한 건 흙의 얼굴들. 온 우주가 키운 생명의 살집들. 부모님의 능숙한 손끝들. 강원도 철원, 고향 텃밭에서 탄생한 새로운 계절이 나의 부엌에 당도했습니다.

네 쪽으로 난 문을 열고 겹겹이 쌓인 신문지 포장을 걷어 내니 강렬하게 퍼져 나오는 맵싸한 향기. 먼 길을 달려온 흙의 정령이 램프 속 지니처럼 별안간 기지개를 켜 부엌을 장악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강렬한 기운에 사로잡힌 채 고향에서 보낸 한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발끝이 축축해지고 손톱에 까만 알갱이들이 밀려들던 때. 밟고 만지고 부볐던 흙의 기억을 길어 올리며 몸 말단에 남겨 놓고 잊고 있던 촉감을 더듬어 보게 되었습니다.




©조한별


거칠고 투박한 것이 그리울 때는 우엉을 찾게 됩니다. 우엉은 줄곧 땅속에서 발 뻗고 살다가 그곳을 벗어나서는 땅 위로 솟아난 나무 행세를 합니다. 단단한 원통형의 겉모습은 물론 단면을 잘라 봐도 영락없는 나무 닮은꼴입니다. 동그랗고 선명한 나이테. 중심축에서부터 바깥으로 뻗어나간 성장의 표식들. 흙이 키운 흔적을 온몸에 새긴 우엉은 씻고 깎고 볶고 삶아도 출생지의 향내를 쉬이 떠나보내지 않습니다. 아니, 열을 가할수록 잊고 싶지 않다는 듯 더 강렬하게 퍼뜨립니다. 그 때문에 어떤 요리를 완성해 내든 웬만해선 우엉의 과거를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진한 흙내음이 그리워 우엉들깨수제비를 끓였습니다. 당근, 감자, 참타리버섯, 표고버섯도 함께 썰어 들기름에 들들 볶았습니다. 멸치 육수 넣고 팔팔, 수제비 반죽을 툭툭 떼고 들깻가루까지 듬뿍 넣으니 바라던 대로입니다. 맵싸하고 구수한 흙과 들이 한 그릇 가득 담겼습니다. 투박하고 은은한 자연의 품이 몸 안에 스며들었습니다.


©조한별


그리고 고구마. 가을 상자에 담겨 있던 것 중에는 유난히 굵고 붉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팔뚝만 한 두께의 우람한 고구마를 만난 건 생애 처음이었던 터라 욕심이 나더군요. 보다 특별한 요리로 그의 미래를 빛내주고 싶었습니다.

맛탕. 고구마를 튀겨 달콤하게 버무린 간식.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 주던 맛탕은 대체로 좋았지만, 한 가지 슬픈 점이 있었습니다. 언제든 ‘복불복’의 가능성이 따라온다는 것. 달콤한 첫맛으로 금세 기분이 좋아지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운이 나쁘면 밋밋하고 퍽퍽한 끝맛을 기어코 견뎌야 한다는 것. 겉모양만으로는 맛없는 고구마를 걸러내기 어려워 매번 속는 기분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맛탕이 준 비극의 경험이었습니다. 배신의 비극이었죠. 처음 보는 자이언트 고구마의 미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장르는 확실한 희극, 환희의 맛탕이어야 했습니다. 겉과 속을 예측할 수 있고 첫맛이 끝맛을 담보하는. 모든 면이 반짝이고 모든 순간 달콤한.

자이언트 고구마를 슬라이서에 올려 얇게 썰었습니다. 고구마칩 맛탕. 이름도 새로 지었어요. 설탕을 녹일 땐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소량의 기름을 두른 팬에 설탕을 얇고 고르게 펴니 눈앞에 반짝이는 설경이 펼쳐지더군요. 고운 눈이 프라이팬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녹아들어 가는 걸 보고 있으니 명상할 때처럼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섣불리 설탕을 섞으면 단단하게 뭉쳐버리기 때문에 스스로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의 느리고 긴 호흡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천천히 투명해지는 시간을 직면하는 경험이었으니까요. 마침내 완전히 녹은 설탕은 고구마칩과 함께 버무리고 희극의 마지막 문장을 마침표로 끝내듯, 다가올 환희를 확신하듯 까만 깨를 콕콕 찍어 그릇에 담았습니다.

새로운 맛탕은 반짝였습니다. 온몸을 빛으로 뽐내는 맛. 처음과 끝이 같은 투명한 맛. 바스락거리는 경쾌한 맛. 실망도 배신도 없는 환희의 맛탕은 코웃음을 공중에서 가볍게 날게 해주었습니다.

상자째 찾아온 계절을 맡고 만지고 익히고 담아낼수록 나의 부엌과 몸에는 작고 귀한 기쁨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Credit
Editor Haeseo Kim
Design Jaehyung Park
Production SIDE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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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8 12:02


  • 2023.11.27 17:51

    굳굳

  • 2023.11.23 10:06

    맛있는 글을 맛 보았네요:)

  • 2023.11.22 12:44

    ^^ 맛있게 잘 찍으셨네요. ^^

  • 2023.11.22 12:44

    ^^ 맛있게 잘 찍으셨네요. ^^

  • 2023.11.13 22:53

    사진과 글이 잘어울려요

  • 2023.11.13 00:45

    요오오

  • 2023.11.07 23:32

    맛탕을 아이들이 탕후루라고 하며 먹더라구요 ㅎㅎ

  • 2023.11.06 01:03

    요리잘하시는분 부러워요

  • 2023.11.03 10:27

    맛탕 도전요~ ㅎ

  • 2023.11.02 23:45

    맛탕 겉부분을 좋아하는데... 슬라이스해서 맛탕하면 겉부분만 잔뜩먹는기분일거같아요...!!! 해봐야겠어요 ㅎㅎ

  • 2023.11.02 11:06

    맛나보이네요~

  • 2023.11.01 21:54

    우왕~~ 맛나보여요~~^^

  • 2023.10.31 10:24

    소박하고도 소중한 요리들이네요

  • 2023.10.31 04:26

    사진도 글 내용과 잘 어울리네요

  • 2023.10.30 23:44

    잘봤습니다 :)

  • 2023.10.30 14:15

    환희의 맛탕! 이렇게 귀여울일인가요! 입맛을 다시면서 읽었습니다~

  • 2023.10.30 07:01

    굿굿!

  • 2023.10.30 02:16

    우와👍👍

  • 2023.10.29 20:37

    집은 가장 행복해야 하는 곳이니까요 ㅎㅎ 좋아보여요

  • 2023.10.29 19:33

    고구마칩 맛탕 맛나겠네요

  • 2023.10.28 14:09

    들깨수제비...! 최애메뉴예요!!

  • 2023.10.28 11:12

    고구마 요리 맛있죠 ^^

  • 2023.10.28 00:46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한 요리들 너무 좋은데요 😍

  • 2023.10.28 00:32

    오오오~😍👍

  • 2023.10.27 18:40

    굿굿

  • 2023.10.27 18:19

    🍚🍚

  • 2023.10.27 18:03

    우엉수제비, 고구마맛탕 모두 참 맛있어보이네요 글도 넘 좋아요~

  • 2023.10.27 17:08

    우엉 좋아하는데 손질이 번거로와 잘 안했었지만 이 글 보니 다시 의욕이 생기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23.10.27 17:02

    와아..부지런..ㅠ 배달음식 시켜먹구후회중입니다ㅜ

  • 2023.10.27 15:04

    와아 맛있겠어요😍

  • 2023.10.27 14:29

    글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우엉볶음이 먹고싶어지네요 ㅎㅎ

  • 2023.10.27 12:36

    먹고시퍼용~ ㅋㅋ

  • 2023.10.27 10:10

    맛 표현이 좋습니다 ^^

  • 2023.10.27 08:39

    대단해요🙃😎👍

  • 2023.10.27 02:34

    오늘도 치킨 시켜먹은 나 자신 반성합니다

  • 2023.10.27 01:42

    ♥️

  • 2023.10.27 01:18

    맛있어보여요👍

  • 2023.10.26 22:14

    멋쪄요^^

  • 2023.10.26 15:59

    재료 본연의 맛이 나서 맛있을 거 같아요

  • 2023.10.26 14:31

    오 사진도 다 이뻐요

  • 2023.10.26 12:25

    멋있어용!!!

  • 2023.10.26 10:57

    건강한 라이프네요 !

  • 2023.10.26 09:21

    사진도 멋있네요

  • 2023.10.26 07:56

    다 좋아하는 재료여서 너무 맛나보여용 ~

  • 2023.10.26 07:07

    흙내음 내는 그 친구들의 그 음식 너무 좋아요. 맛있겠다..ღ

  • 2023.10.26 04:58

    딸이 이렇게 잘 요리해먹고 지내니 부모님은 맘이 든든하실듯

  • 2023.10.25 23:43

    다 너무 맛있어보여요😋

  • 2023.10.25 22:39

    화이팅입니다!

  • 2023.10.25 21:07

    이런 거 너무 좋아요♡

  • 2023.10.25 21:01

    맘이 편해지는🌱👍

  • 2023.10.25 20:54

    소박한데 풍성함이 느껴지네요~잘 읽었어요

  • 2023.10.25 20:11

    안온함이 느껴지는 글이에요:)

  • 2023.10.25 19:48

    아 너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글입니다 ! 🫶

  • 2023.10.25 17:55

    너무나 바른 라이프 생활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어요 ㅎ

  • 2023.10.25 17:50

    고구마침 맛탕! 저도 만들어 보고 싶네요~

  • 2023.10.25 17:21

    먹고 감사하고 짓고 씁니다라는 말에서 모든게 함축된 글이네요^^ 공감합니다!

  • 2023.10.25 17:12

    잘 봤습니다. 요리와 글이 주인을 닮은거겠지요? 담백합니다. :))